[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 에세이] 선악의 저편에 핀 청춘이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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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6-29 16:04 조회 6,300회 댓글 0건본문
1 유쾌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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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만화를 읽고 그리고, 만화 이야기만 연속 발사하는 재밌는 아이였지요. 현실 세계보다 만화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아이. 그렇게 아이의 내 면은 만화처럼 자라났습니다.
예술 고등학교를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되지 않아 사립 예술 고등학교에 간다고 하네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라 부모는 부담입니다. 수업료도 비싸지만 재료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찬성했습니다. 만화로 세계를 배운 아이에게 만화는 현실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으니까요. 부모를 설득했고 어렵게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만화가 좋은 아이는 이렇게 만화로 세상과 만나고 자 합니다. 열심히 그렸을 테지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아이에게 전공을 바꿀 것 을 제안합니다. 만화보다 조소는 어떻겠냐고. 아이가 유일하게 아는 예술가를 예로 들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들은 조각가였기에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었다고 꼬였습니다. 갸우뚱합니다. 만화와 회화는 다르다고 하 네요. 다시 설득합니다. “만화를 전공한 훌륭한 만화가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만화를 잘 그렸던 예술가는 많다.” 설득에 넘어갔습니다. 만화가는 만화만 그릴 수 있지만, 조소가는 만화도 그릴 수 있다는 의미가 마음 한편에 울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 성적표를 보면 한숨이 나왔지요. ‘양’들과 친했고 ‘가’라는 말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당연한 결 과였습니다. 만화를 좋아했으니 만화 캐릭터만 큼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을 터입니다. 아이가 읽은 만화 중 공부 잘하는 주인공은 없었으니까 요. 아마도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공부를 잘했다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을지 도 모릅니다. 속단이지만, 그럴 만큼 만화에 깊이 빠진 아이입니다.
어느새 대학을 간답니다. 조소를 전공하면 만화를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설득이 충격이었는지 열심히 실력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학교에서 칭찬이 대단합니다. 인류대학을 목표로 해도 좋다고 하네요. 학원비도 지원해 준답니다. 예술가들의 로망 ‘H 대학’에 수시 고사를 보았습니다. 조건부 합격이랍니다. 수능 성적이 평균 3등급만 넘으면 영광의 일류 대학으로 직진합니다. 성적표에 잘함보다 못함이 많았던 ‘찌질이’ 아 이가 변신했습니다. 아이와 부모는 열광하고 승자가 된 양 소곤소곤 자박합니다.
한국 고전에 대한 바탕 정보가 없는 아이는 고전 때문에 고전하고 말았네요. 영광의 일류 대 입학은 미끄러졌습니다. 다행히 수능 최소등급제가 없어 보험 삼아 넣은 ‘J 대학’에 합격합니다. 조소 실력만은 최고라는 인정이지요. 대한민국의 입시제도는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조소를 공부하는 데 수능 성적이 3등급 이상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술분야에 소위 일류대라는 ‘S대’와 ‘H대’만 수능최소등급제를 고집합니다. 예술을 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한다는 이 유겠지요. 하지만, 공부 잘한(물론 이 공부는 일반 이 아니라, 맞춰진 공부며 해야만 하는 의무입니다.) 위대한 예술가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수능 후 아이의 생활이 다시 만화 속으로 빠 져듭니다. 삼류 만화를 좋아했던 아이는 초등학 교 시절에 즐겨봤던 만화를 다시 봅니다. 『드레 곤볼』, 『원피스』, 『탑플레이트』 같은 만화들이었지요. 부모가 걱정합니다. 아무리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도, 시간을 허비하는 아이가 불안하기도 할 텁니다. 제게 부탁하네요. 저희 집에서 같이 공생해도 되겠냐고? 고민 없이 허락합니다. 그렇게 아이와 저는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2 방랑하는 아이에게 주었던 니체
이쯤 되면 궁금하겠네요. 아이와 저의 관계 말 이지요. ‘사제지간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는 제 조카입니다. 처가 쪽 조카지 요. 아이는 제게 ‘고모부’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가까워지기 참 애매한 관계지요. 고모와 의 친근함은 섞인 피의 농도만큼 밀접할 테지 만, 고모부와의 인연은 가끔 명절 때 용돈 주는 사이 정도로밖에 개선되기 어려운 게 우리들의 친척 세계니까요. 더구나 저는 남자고 아이는 여자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일주일 정도 만화에 푹 빠져 살았던 아이가 제 집에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입시 후 몸이 많이 망가 져 있었습니다. 작은 키에 70Kg이 넘는 몸을 가지고 있었지요. 조금만 걸어도 피곤해 했고 귀찮은 것들은 모두 나쁜 것이라는 편향에 싸여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아이처럼 보였지요. 몸부터 바꿔줘야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우선 같이 뛰었습니다. 조금씩 몸을 만들어야 무리 없이 몸을 만들 수 있다는 운동 의 기본 공식은 아이하고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점진적 개선을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지요. 운동 장 20바퀴 뛰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아이는 오장이 틀리고 몸과 정신이 이탈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다음날은 줄넘기 1,000 번까지 보탭니다. 그 다음날은 제가 다니는 무에타이 도장에 데리고 갔습니다. 달리기와 줄넘기를 버거워했지만, 무에타이는 좋아하네요. 만 화 『권법소년』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정신없이 운동만 하고 보냈습니다. 아 이는 10시만 되면 지쳐 쓰러지곤 했습니다.
같이 공생한지 2주째 되는 날. 이젠 정신적 다이어트를 시작합니다. 온갖 쓰레기 정보로 가득 한 아이의 정신을 청소하기로 했지요.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책을 같이 읽었습니다. 니체를 추 천했습니다. 청춘은 방어력이 아닌 공격력을 공부할 때니까요. 몸은 피곤하고 책은 어렵고 고모부는 채근하고 아이는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술도 먹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 고, 특히 만화책에 푹 빠져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낡은 습관을 거역할 수 있는 대안은 독서라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니체가 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를 함께 읽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때, 좀 더 저급하 고 조잡한 영혼이 좀 더 고귀한 영혼보다 더 형편이 좋다 : 후자의 위험은 더 클 수밖에 없으며 더군다나 그들의 생존 조건이 복잡하기 때문에 재난을 당하고 파멸할 개연성이 엄청나다.–도마뱀의 경우에는 없 어진 꼬리가 다시 자라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 게 되지 않는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중 「선악의 저편」 276번
고귀함보다 저급함이 오히려 손해를 덜 볼 수 있다는 문장이 아이의 뇌리를 관통합니다. 아이 가 좋아하는 만화는 저급함의 상징이었으니까요. 더러움과 조급함이 고귀함보다 왜 인간적임 을 알고 싶어 하는 표정입니다. 아이가 묻습니다.
“저급함이 고귀함보다 좋은 이유가 뭐예요”
“고귀함과 저급함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공식이지. 태초부터 귀천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 람들은 고귀함과 저급함을 가르고 고귀함을 맹신하는 편향이 강하지. 고귀함에 목숨을 거는 최고 경지가 전쟁이고, 때문에 고귀함은 위험할 수 있다는 거야. 저급함보다 고귀함이 옳다는 판단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거든. 또한 도마뱀은 고귀함을 쫓으려다 강적을 만나 면 꼬리를 자를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기 에 파멸하고 말지. 고귀함을 향한 맹목적 도전 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거야. 니체는 저 급함의 비천함보다 고귀함 속에 내재된 폭력성 을 고발하고 싶었던 게지.”
다음 절을 같이 읽어 보았습니다.
–방랑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비웃음도 사랑 도 없이, 헤아릴 길이 없는 눈으로 네가 너의 길을 가 는 것을 바라본다. 모든 심연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 하고 다시 밝은 햇빛 속으로 올라오는 측연(測鉛)처 럼 축축하고 측은한 모습으로–그것은 그 심연 아래 서 무엇을 찾았는가–, 탄식하지 않는 가슴으로, 스스로의 구토를 감춘 입술로 가까스로 천천히 무엇 을 잡으려는 손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는 너는 누구 인가? 너는 무엇을 해왔던가? 여기서 쉬어라 : 이곳 은 모든 사람을 후하게 맞이하는 장소이다.–네 기운 을 회복하라! 또한 네가 어떤 사람이든, 지금 너의 마 음에 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너 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말해보라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너에게 주겠다!–“기운을 회 복하기 위해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오 너, 호기심 많은 사람이여,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러나 나에게 주려무나. 부디–”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일까? 말해보라!–“그것은 또 하나의 가 면! 두 번째 가면이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중 「선악의 저편」 278번
가면을 벗고 방랑하는 자신을 직시하라는 니체의 잠언이 아이에게 충격을 줍니다. 차안의 고 통을 피해 피안의 세계로 도망하고자 하는 욕망이 만화를 즐기는 치기는 아니었는지 고백하라는 명령이었지요. 환상 속에서 사는 자기가 민망해졌을 텁니다. 아이는 멍하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화를 재고하는 모양이었고, 방랑하는 자신에게 부끄럽다는 표정이었지요. 다음날부터 아이는 다른 세상을 사는 듯 스펀지처럼 자신을 바꾸기 위한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비천한 만화를 좋아했던 자기 도, 방랑하는 자기도 모두 진실된 자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싶은 모양입니다.
다음날부터 아이는 강해지고 싶다는 말을 자 주 하곤 합니다. 조금 더 강해지면 조금 덜 창피 할 수 있겠다는 고백이었지요. 운동도 공부도 이 젠 저보다 성실히 수행합니다. 니체를 잘 알지 는 못하지만 제대로 니체를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니체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문장을 온몸으로 느끼는 수행입니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독서는 ‘보는 것’이 ‘읽는 것’이지요. ‘읽는 것’이란 정보를 체득 하는 것을 넘어 활용하는 것이고, 그 활용을 통 해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들어가지 않는 정보는 한낱 문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청춘은 니체처럼
아이는 대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라고 부르기가 살짝 민망한 나이가 되었네요. 벌써 어른이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진짜 어른이 되니 까요. 하지만 저는 그냥 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보통 만나는 제자들보다 훨씬 많이 만났기 때문에 훨씬 깊게 아는 사이가 되었거든요. 가끔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저는 아이의 ‘선생님’이길 바라 고 아이는 제 ‘제자’이길 원하니, 성인이 되었다 고 해도 저는 ‘아이’라고 부를 겁니다. 무엇인가 를 배우고 익히는 관계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어른과 아이의 관계일 수도 있으니 까요.
이 시대엔 ‘사제관계’뿐 아니라 ‘장유유서’의 관계 또한 사라졌습니다. 위와 아래가 있어야 좌 와 우도 있고 사회의 연속성도 보장됩니다. 우 리 사회가 ‘단절의 사회’인 이유는 이 비대칭적 인 관계가 슬그머니 몰가치적인 관계로 오해받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이런 평등을 가장한 민주주의를 양떼들의 놀이터라고 비꼬기 도 했지요. 민주주의가 우리 안에서 자기들끼리 평등을 경쟁하는 시스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는 지속돼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은 세대 단절이 아니라 세대 연속 이 될 수 있지요. 물론 이 ‘위’와 ‘아래’는 ‘위’를 위한 관계가 아니라 ‘아래’를 위한 관계여야 합니다. 윗사람을 위해 아랫사람이 희생하는 구조 가 아니라 아랫사람을 위해 윗사람이 희생하는 구조가 돼야 ‘장유유서’는 ‘단절의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관계 지향점이 될 수 있는 것이 지요. 요컨대 ‘장유유서’의 회복은 의미를 배우 고 가치를 판단하는 관계의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낡은 장유유서는 없어져야 할 나쁜 이념입니다.
아이는 졸업 작품을 내야하고 분주히 대학 후 미래를 재단해야 합니다. 불안하고 고통스러 운 시간이겠지요. ‘경쟁’이 ‘생존’이 된 세계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아이에게 경쟁을 이기라고 가르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양보하며 살라는 도덕 강령 같은 덕담을 들려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솔직하고 정직해지라고 명령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한 청춘만이 사회와 자기를 꼿꼿하게 볼 수 있다고 말이지요.
갈대보다 대나무가 되라고 하기도 합니다. 갈대처럼 시류에 이끌려 생존을 보장받는 존재는 청춘이 아니니까요. 청춘은 시대의 풍파를 올곧게 버티는 자존심 같은 것입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부러 거는 존재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청춘은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며 정직합니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고 사회를 바꾸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법이지요. 청춘이 이상주의자인 까닭은 청춘이 정직한 이유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존재를 비단 청춘의 시절만이 아니라 삶의 이정표로 살라고 충고합니다.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이상을 지니지 않은 인간보다 더 경박하고 파렴치하 게 살아간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중 「선악의 저편」 276번
정직함은 이상을 만듭니다. 정직함이야말로 꿈을 꾸게 합니다. 정직함은 혁명입니다. 청춘이 정직한 춤을 춰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정 직은 비단 청춘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정직은 존재 모두의 문젭니다. 죽는 날까지 정직할 수 있다면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니체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지요. 그의 청춘예찬은 21세기에도 그의 사상을 잊지 못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가 살았던 불행의 삶이 우리들에게 행복의 용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 은 정직함에서 시작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청춘이고 청춘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직은 이상을 향한 첫 계단입니다.
방학부터 시작했네요. 퇴계의 ‘4단 7정’ 이론을 만화와 조소로 표현합니다. 다이어그램을 유화 로 그려 자신의 작품 개요도를 완성하는 것까지 설계했습니다. 비천함의 상징이었던 만화가 자신의 꿈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고, 다빈치에 솔깃하여 선택했던 조소가 졸업 작품의 수단이 되며, 예대에서 무수히 그렸던 회화가 작품의 얼개가 됩니다. 이런 전방위적인 예술가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이 아이가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장유유서’의 관계는 ‘양’들과 친하고 ‘가’라는 말을 좋아했던 성적표의 주홍글씨를 지울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찬란한 미래를 장담할 순 없지만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르게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 로 청춘처럼 살아가는 방식이고 ‘니체처럼’ 살아가는 방식이며,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선택입니다.
새벽 4시가 넘었습니다. 주말이라 제 집에 내 방한 아이가 열심히 졸업 작품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자기가 좋아했던 만화를 소재로 그려갑니다. 눈이 충혈되고 초점이 흐릿해 보이지만, 승부를 내겠다는 고집으로 버티고 그립니다. 저는 아이의 시선 바깥에서 마감 원고를 씁니다. 잠시 마당으로 가 담배 한 가치를 물었습니다. 알싸한 기분이 살아 있다는 충동을 강력하게 응축하네요. 아직 푸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도 저도 오늘 새벽은 청춘 입니다. 니체처럼 푸르고 니체처럼 ‘이상’을 향 해 달려갑니다. 꿈꾸는 아이와 꿈꾸는 어른과 의 만남입니다. 이 꿈이 아이와 저를 늘 푸르게 하는 에너지가 되겠지요. 니체처럼, 니체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