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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전 읽기는 왜?]삶의 긴 여정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그려 낼 수 있을까? 호메로스『오디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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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1-06 23:11 조회 7,90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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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인문학자, 『인문학은 밥이다』 저자
 
신화는 은유다

우리는 흔히 신화를 허황된 이야기 혹은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화는 결코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름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다. 신화는 은유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아니 최근까지도 신화는 미신적이거나 비논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오로지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만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오히려 편협하고 무지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 사람들은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면서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환상적인 모험과 삶의 상징에관한 멋진 이야기라고 칭찬한다.
신화에 영감을 얻은 대표적 인물은 정신과의사이며 심리학자인 S.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이면서 청출어람하며 갈라선 칼 G. 융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에 의식과는 다른 또 다른 의식 세계, 즉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놀랍게도 그리스 신화에서 그 보편적인 모습을 찾아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결국 신화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라 인간과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융은 세계 곳곳의 신화, 종교, 민담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념들을 연구하면서 개인이 아닌 인류에게 보편적인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것이 바로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혹은 ’보편적 무의식‘이다. 융은 무의식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집단무의식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지닌, 유전된 무의식으로 작동된다. 세계의 수많은 신화들을 조사한 그는 줄거리나 등장인물에 유사성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유전적으로 계승되어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예술에서 사고와 분석을 확장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신화에 관한 그의 해석은 신화에 대한 재조명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지프 캠벨이 신화의 영웅에 관해 분석하면서 그것이 초인적 영웅 또는 초자연적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힘을 주인공을 통해 투사하고 그 힘을 자신에게까지 이어 가려는 욕망이 표현된 것이라고 본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리스 신화’나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이 시간과 공간, 등장인물만 다를 뿐 이야기의 구조나 상징체계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화의 상징은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과거와미래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절이다. 그런 점에서 서양 문학의 뼈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서양 정신의 틀을 제공해 주는 그리스 신화는 매우 중요하다. 대개 그리스 신화를 처음 읽을 때 수많은 이름이며 신들의 성격과 특징을 외느라 힘들어한다. 나도 학부 영문과 시절 ‘영문학 배경’이란 수업에서 성서와 그리스 신화를 배울 때조차 그 ‘족보’를 외느라 진땀 흘렸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래서 따로 족보를 만들어 확인하며 읽었다. 그러니 그냥 읽는 입장에서 그 이름들이 헷갈리는 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게다가 ‘그리스–로마 신화’ 때문에 그리스 식 이름과 로마 식 이름이 다르니 둘을 확실히 구분해서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물론 그리스어 의미를 새겨보며 읽으면 그 이름 자체가 성격과 특징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점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거야 전공자 혹은 그리스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될 뿐이다. 그래도 일단 이 난관만 넘어가면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끝없이펼쳐진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게다가 이 신화가 그리스만의 그리고 서구인만의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 보편의 의미와 삶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 보면 대단한 서사구조임을 알게 될 것이니 그 수고로움은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는다.
 
신들은 언제나 불공평한가?
 
그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더 위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니 그것은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 8세기 후반)는 트로이 전쟁의 신화를 바탕으로 인류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데, 이는 그 진위를 떠나 시각장애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기억력이 더욱 비상해진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또한 위대한 ‘음유시인’답게 이 위대한 서사를 방대한 6운각 시구(hexameter)로 표현했다. 운문의 규칙적인 리듬은 기억과 구술 낭독에 알맞은 이야기 방식이 다. 무엇보다 운을 가지고 있으면 암송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마치 우리의 가사들 상당수가 ‘3・4구조’로 이뤄진 것처럼, 혹은 성서의 ‘시편’이 노래의 운율로 짜인 것처럼. 그것은 구전문학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번역된 글에서는 그런 맛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소년들은 살아 온 시간이 그리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부조리와 몰이해, 비합리성 등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낀다. 자신의 생각처럼, 품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특히 자신은 정말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때, 야속하고 화가 날 것이다. 심지어 왜 운명의 신은 자신만 괴롭히고 못살게 만드는지 미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잘 읽어 보면 인물들이 제멋대로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편을 짜고 갈라질 뿐 아니라, 엉뚱하게 인간들까지 제 편의에 맞춰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갈등과 오해는 크고 너른 시각에서 보면 신들의 농간이 아니라, 각 신들이 상징하고 대표하는 특징, 즉 우리 인간의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짚어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정의와 진리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근원적 낙관의 근거이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 운명의 실타래를 오래, 그리고 길게 헤치고 이겨 낸 대표적 인물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으면 신들조차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바로 오디세우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이다.
두 이야기의 배경은 트로이 전쟁이다. 그것은 얼핏 보면 신들이 불필요한 갈등 때문에 생겨난 전쟁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을 때, 여러 신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으나 초대에서 제외된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분노가b만들어 낸 ‘문제의 그 사과’가 세 여신(아테나, 헤라, 아프로디테)에게 던져졌고, ‘공정성’을 위해 트로이에서 인질로 온 왕자 파리스에게 판결을 맡겼다. 각 여신은 청년 파리스에게 조건을 제시했고 그는 최고의 미녀를 제시한 아프로디테에게 그 사과를 바쳤다. 사실 이 사건 자체가, ‘아름다움, 지혜, 운명’의 가치 중 아직 삶의 여정을 겪지 않은 청년은 아름다움에 먼저 끌릴 수밖에 없다는 보편성의 상징이다. 아마도 이런 과정들은 호메로스의 창작이라기보다는 당대인들이 (심지어 현대인들까지도) 품고 있던 삶의 과정에 대한 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일어난 사달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신들은 때론 이해관계로 때론 정실로 얽히고설켜 패를 가르고 인간들이 그 전쟁을 대리한다. 신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전쟁의 과정을 왜곡하거나 간섭한다. 그것은 매우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전쟁이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삶의 모든 과정들이 매순간 불공정하고 불공평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이것조차 보편적 삶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두 이야기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바로 오디세우스이다. 그리고 그의 삶의 여정, 특히 전쟁 이후 귀환하는 모험담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디세이아』이다. 그가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10년에 걸친 모험을 담은 대서사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말해주오, 뮤즈 여신이여. 무수히 많은 곳을 돌아다닌 한 사나이의 행적을. 그 사내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후 너무 멀리까지 헤매었고, 수많은 인간들의 도시를 보았으며 풍속을 익혔다오.”
10년에 걸친 길고 지루한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는 처음부터 너무 큰 고난들이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 오디세우스는 키클롭스인 폴리페모스의 눈을멀게 만들어 도망갈 수 있었지만, 폴리페모스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폭풍으로 인해 귀향길을 망치게 된다. 신은 마치 소일거리 찾듯 정의가 아니라 자기의 편의와 이해에 따라 마음대로 운명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오디세우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가족으로의 귀환이라는 궁극적 가치 때문이다. 자신이 품고 있는 궁극적 가치는 심지어 운명의 신조차 막을 수 없다. 설령 간섭하고 개입할 수는 있을지언정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때로는 인간의 의지가 신의 불공정성마저 이겨 낼 수 있다. 그게 궁극적 정의다.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정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디세우스에게 가족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자 미래에 대한 바탕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신의 삶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는 결코 만만하지도 쉽지도 않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바로 그러한 상징들이다.
 
나의 의지가 신의 불공정성마저도 이겨 낼 수 있다
 
신이 늘 불공정한 것은 아니다. 때론 심술도 부리고 농간마저 마다하지 않지만 인간의 심지가 곧고 강하면 감화되어 돕기도 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키르케다. 키르케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로 눈이 부실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며 인간을 동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는 마녀로 유명하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했지만 마법에 걸리지 않은 오디세우스가 부하들을 살려 내기 위해 자신은 이 섬에 남아 있겠다고 말하자 키르케가 대원들에게 걸었던 마법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키르케와 오디세우스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1년간 그와 부하들을 섬에 붙들어 머물게 하였으며, 둘 사이에서 텔레고노스가 태어났다. 대개 이쯤이면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아쉬울 것도 없고, 매혹적인 여신과의 새로운 사랑도 생겼으니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청소년은 꿈꾸는 세대이다. 꿈은 무한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꿈을 이룰 힘과 지능은 아직 부족해서 쉽게 꿈이 접히고 꺾이며 바뀐다. 하지만 아무리 변하고 바뀌어도 자신의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꿈은 접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의 달콤한 시간을 끝내 포기하면서 집으로의 귀환을 접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모범이 될 것이다. 결국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 바다 요정 세이렌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해가는 방법을 일러 주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은 모험과 위험의 연속이었다. 폴리페모스, 키르케, 세이렌이 그랬고 심지어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수년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늘 포세이돈의 심술이 따랐다. 포세이돈을 자극한 것은 오디세우스의 오만 때문이었다. 젊은이에게 그런 설익은 오만은 흔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단련되고 겸손해졌다. 청소년의 오만과 설익은 패기 또한 살아가면서 정화되고 성숙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여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이겨 낼 수 있음을 사람들은 『오디세이아』를 통해 확인한다. 『오디세이아』에도 여러 신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일리아스』처럼 늘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운명은 신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위대한 역설이기도 하다. 『일리아스』는 용기는 넘치지만 다분히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반면 『오디세이아』는 책임,의지, 인내, 절제, 합리적 용기 등 인간의 이상적 가치가 전체적으로 깔려 있다는 점에서도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인간의 이성이 무책임한 복수의 무한소급을 끊는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 시련은 귀향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왕궁은 아내 페넬로페이아에게 구혼하려는 사내들로 들끓었다. 그 구애는 물론 그녀의 미모와 명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왕궁을 차지하기 위한 속된 셈법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삶은 아무리 자신을 지키려 애써도 온갖 농간과 모략이 훼방하는 것이다. 페넬로페이아는 수많은 기지를 발휘하여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버텼지만 10년의 시간은 더이상 버티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오디세우스의 활로 시합하여 오디세우스의 후계자를 정하기로 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디세우스의 활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작용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기가 막혔다. 예전 같으면 근처에 얼씬도 못할 온갖 듣보잡들이 자신의 왕궁에서 무위도식하며 재산을 축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아내를 능멸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도 자신이 스무 해 가까이 집을 비웠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위엄과 자산(가정과 왕궁)만 고려사항일 뿐이었다. 분노에 찬 그는 아무도 모르게 왕궁에 들어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구혼자들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거지로 변장해서 시합에 출전하였고 아들의 도움을 받아 구혼자들을 살육했다.그런데 그들이 모두 그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니 또다시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신 아테나가 중재하지 않았다면 피비린내 나는 무한 복수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무모한 복수의 무한소급을 끊는 것이 갖는 의미이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합리적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끝없는 복수의 연속은 결국 모두를 파멸시킬 뿐이다. 스무 해 남짓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분노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여신 아테나는 바로 그런 고민과 번뇌를 풀어 줄 이성의 힘을 상징한다. 전쟁을 야기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신들의 무책임과 불공정성조차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다. 그러므로 오디세우스의 무참한 살육과 복수로 이어질 수 있는 엄청난 위험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이야기의 결말에 숨은 깊은 뜻이다.
청소년은 아직 판단 능력이 성숙되지 않은 까닭에 쉽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그 때문에 다툼과 반목의 상처를 주고받기 쉽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만의 소속감을 통한 우월감과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남을 따돌리고 그것도 모자라 폭력까지 행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잠시 즐거울지 모르지만 피해자에게는 증오와 복수심을 일으킬 뿐이고,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기회가 주어지면 실제로 복수의 행동으로 옮겨진다. 오디세우스가 귀향해서 벌이는 무참한 복수의 말미에 뒤늦게나마 그것이 만들어 낼 비참한 운명을 깨닫고 화해하는 대목은 좀 더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오디세우스가 화해하는 것을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 그것은 연대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청소년 시기에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덕목은 바로 연대이다. 화해와 연대의 가치는 훈련하지 않으면 결코 절로 얻을 수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영웅의 위대한 서사에 빠져들면서 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projection)’라고 한다. 물론 조지프 캠벨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단순한 투사가 아니라 대행(代行)의 상징이며 그런 서사를 통해 자신의 잠재된 위대한 힘을 인식하고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저 그 주인공의 영웅담에만 빠져 다른 것들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이 이야기의 끝 부분이 비록 오디세우스의 진지한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테나 여신을 끌어들여 중재하는 한계를 지니고는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바로 이성에 근거하는 것임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내가 누군가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잠시의 쾌감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모스를 조롱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된다. 그것은 이겨내야 할 난관이지만 동시에 불필요한 낭비를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우리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 영감을 얻은 작품이 바로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이다. 배경은 20세기 더블린이고 10년의 시간이 아니라 단 하루 사이의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무색하게 하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조이스는 현대적 ‘오디세이아’를 쓰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율리시스』는 『오디세이아』를 따라 인물의 역할을 나누고 에피소드들도 그 원형에 맞춰 꾸렸다. 그밖에도 대다수의 에피소드들이 『오디세우스』를 바탕 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헤아리며 두 이야기를 읽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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