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책 속에서 상상으로만 음미하는 낯선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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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6-04 10:55 조회 533회 댓글 0건본문
책 속에서 상상으로만 음미하는
낯선 음식들
신수진 번역가
나는 밥과 김치라는 가장 기본적인 한식을 잘 못 먹는 어린이였다. 밥은 늘 까끌까끌했고, 김치는 맵고 짜서 먹기 힘들었다. 밥투정하는 시골 어린이를 어르고 달래며 미역국에 밥을 말고 김치를 잘게 썰어 먹이느라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꾸역꾸역 밥과 반찬을 씹어 넘기면서 나는 책에서 본 서양 음식의 맛을 상상하곤 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먹고 싶어 하는 흰 빵은 무슨 맛일까. 빵에 얹어 먹는다는 염소젖 치즈는 또 뭘까. 수프는 국이랑 비슷할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걸까. 어른이 되면 외국에 나가서 빵이랑 수프를 삼시 세끼 먹으며 살 거라는 입 짧은 딸에게 엄마는 결국 전기 쿠커를 장만해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기도 하셨다. 지금 나는 거의 20년 경력의 ‘홈베이커’지만, 계란 거품 내고 머랭 치는 일이 귀찮아서 케이크나 카스테라는 특별한 때 아니면 잘 만들지 않는다. 전동거품기도 없던 시절에 손으로 저어 가며 계란 거품을 냈을 엄마의 노동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세상에 밥과 김치가 아닌 다른 맛있는 음식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넓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잘 모를 법한 낯선 음식 이름이 나올 때는 각주로 해설을 하더라도 정확한 이름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름의 내 신념이다.
블루베리를 딸기로? 음식명 번역의 아쉬움
1942년 칼데콧상 수상작 『아기 오리들한테 길을 비켜 주세요』(시공사, 1995)의 작가 로버트 맥클로스키는 본 책을 비롯해 자신의 가족이 등장하는 그림책 『Blueberries for Sal』(1948)과 『어느 날 아침』(2018, 원제 One Morning in Maine)이라는 그림책으로도 칼데콧상을 수상했다. 『Blueberries for Sal』은 엄마와 함께 산으로 블루베리를 따러 간 주인공 샐이 마찬가지로 블루베리를 따 먹으러 나온 아기 곰을 만난다는 이야기다. 전집 속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한국어판이 나와 있다. 제목은 뜻밖에도 『딸기 따는 샐』. 으응? 블루베리는 나무에서 열리고 딸기는 다년생 초본(겨울에는 땅 위의 부분이 죽어도 봄이 되면 다시 움이 돋아나는 풀)에서 열린다. 점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면서 따는 동그란 나무열매가 아무리 봐도 딸기일 리가 없는데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블루베리를 낯설어할 수도 있을 어린 독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더 흔한 베리류인 딸기로 바꾼 것 같은데, 차라리 나무에서 열리는 ‘산딸기’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한편, 린드 워드의 1953년작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곰』(2002, 원제 The Biggest Bear)에도 곰이 블루베리를 따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국어판 번역은 블루베리가 ‘포도’로 되어 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장면이지만 블루베리의 생태적 특성이 버젓이 묘사되어 있는데도 이를 전혀 다른 과일로 번역한 점은 마찬가지로 아쉽다. 블루베리를 모르거나 먹어 본 적 없는 어린이 독자가 책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라서 블루베리를 먹을 기회가 생길 텐데. 그 독자가 처음 블루베리를 맛보는 순간,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에서 곰이 맛있게 먹던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어느 날 아침』은 작가의 가족이 살았던 미국 메인주의 작은 섬과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다. 블루베리를 따던 샐은 어느덧 훌쩍 자랐고 아빠를 도와 대합조개를 잔뜩 캐 오는데, 나는 이 책에서도 음식 이름 번역에 불만이 있다. ‘클램 차우더’가 ‘대합조개탕’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건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음식 아닌가(대합조개탕이라고 하니‘아, 이거 술안주인데’하는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조개 크림수프’로 번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 속 음식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기쁨 지켜 주기
『호첸플로츠 다시 나타나다!』(1998)에 나오는 ‘송이버섯 수프’도 우리에게 친숙한 송이버섯이 아니라 ‘포르치니’라는 향기 진한 버섯으로 만든 음식이다. 이에 『내 식탁 위의 책들』(2012)에서 정은지 작가는 위 책을 두고 “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은 결코 송이버섯이 아니었다”면서 “이 대목은 나를 20년 이상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결국 독일 웹사이트를 뒤져 호첸플로츠와 버섯 이야기를 다룬 한 블로그를 찾아냈고, 우리말로는 ‘그물버섯’이 포르치니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인해 낸다. 지금도 어떤 독자는 『딸기 따는 샐』을 읽으며 ‘이게 딸기일 리 없는데’ 하며 탐구심을 발휘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릴 적 동화에서 읽었던 ‘요크셔 푸딩’이라는 음식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육두구’라는 향신료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았을 때, ‘처트니’ 소스를 비로소 맛보았을 때 느꼈던 감흥을 잊지 못한다. 하물며 오늘의 어린이 독자들은 지금 어른들이 예상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새로운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나는 내가 모르는 식재료나 음식이라도 섣불리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