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키워드로 읽는 책 - ‘문명’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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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7 22:45 조회 7,276회 댓글 0건본문
‘문명’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셨는지요. “사람의 지식과 기술이 발달하여 생활이 편리하고 물질이 풍족해진 상태” 혹은 “원시 사회에 견주어 학문, 기술, 예술 들이 크게 앞선 것”이 문명에 대한 사전적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문명이란 발달과 편리, 풍족의 다른 말입니다. 돌도끼 하나에 목숨을 맡기고 사냥을 나섰던 원시인들에 비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이 일상으로 들어온 우리 시대는 기술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습니다. 반상班常과 남녀의 차이가 엄격했던 조선시대보다 남녀노소가 평등한 우리 시대는 지식의 진보에 따른 문명의 수혜를 입고 있습니다.
문명의 새로운 개념 제시하는 『슬픈 열대』
우리에게 ‘문명’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엉뚱하게도 어릴 적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본방 사수했던 만화 <미래소년 코난>에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코난과 포비가 라나를 도와 흥미로운 모험을 펼쳐나가지만, 실상 만화의 배경은 고도화된 문명으로 피폐해진 지구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기계문명의 정점 ‘인더스트리아’가 통제합니다. 기술 문명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의 생활이 편리하지 않고 오히려 통제를 받습니다. 기술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 또한 발전했을 텐데, <미래소년 코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물지 않은 생각의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갑니다.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에 대한 정의가, 그것도 사전적 정의가 올바르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또 다른 관념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문명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바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아마존의 원시부족을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문명이라곤 접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야만인’들이었죠. 하지만 원시부족의 삶을 연구하면 할수록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인들이 야만인이라고 치부한 원시부족의 삶이 전혀 야만스럽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나름의 문화와 규칙들 속에서 그들이 처한 삶을 지혜롭게 개척하고 있었기에 더 문명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카두베오, 보로로, 남비콰라, 카와이브 등 아마존 밀림의 4개 부족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는 그들이 개인의 존엄은 물론 사회적 규칙 등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도리어 놀랍니다. 사실 서구 사람들의 기준에 맞춘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은 허구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고 해서 우리는 저절로 ‘문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삶의 환경을 긍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문명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우리 시대 고전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소위 문명 사회라고 하지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평가받지 않고 ‘가진 것’에 의해 평가받기 일쑤입니다. 천진난만해야 할 초등학생들마저 아파트 평수에 민감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명품 가방, 더 넓은 아파트, 고급 외제 승용차에 스스로의 삶을 저당 잡힌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이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로 평가받는 하나의 ‘물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소위 ‘문명’이 발달한 현대 산업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은 더 많이 갖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커다란 꿈을 꾸어도 모자란 청소년들에게 학교와 학원 사이를 새벽부터 새벽까지 전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미래…. 부모들은 소박한 꿈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이러한 삶의 패턴은 우리 자녀들을 소유에 집착하는 삶으로 내몰기에 충분합니다. 소유가 많으면 과연 행복할까요. 소유의 끝은 어디일까요. 소유의 끝이 없는데, 감히 행복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이제는 우리도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무한 성장이 아닌 선택적 성장을 지향하며, 물질적 이익보다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이제 시작할 때입니다. 『소유냐 존재냐』는 단순히 철학적 틀거리에서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합니다. 그 대안들이 궁금하다면 지금 곧 서점으로 달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현대 문명의 폐해 속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 존재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 바로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입니다. 소유하는 삶의 방식은 욕망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착취와 차별, 가난, 불황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은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에서 이처럼 “부도덕”하고 “터무니없는 부조리”한 것들에 반대하고 저항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의 “밥벌이를 빼앗고 영향력과 신분까지 빼앗으며”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와 메인에서 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조화로운 삶”을 조용히 실천했습니다. 단지 전원의 한가함을 즐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우리가 문명이라 이르는 것들에 대해 반문하고 저항합니다. 스코트 니어링에 따르면 조화로운 삶이란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삶과 역사의 전개, 문명 사회 모두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지요.
하지만 조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할 오늘날 문명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조화롭지 못한 결과만을 낳고 있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은 이 책에서 “누구라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조화로운 삶을 살 것,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라는 말로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삶』과 『조화로운 삶의 지속』 등 니어링 부부의 모든 책은 현대 문명이 나아갈 바를, 아니 일상을 대안적 삶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좋은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소유와 존재의 문제에서 갈등하는 사람 중 제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개츠비’입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개츠비는 오로지 부와 출세를 꿈꿉니다. 어렵사리 만난 상류사회 여성 데이지에 홀딱 빠져버리지만 그녀는 개츠비가 해외 파병된 사이 대대로 부자인 뷰캐넌과 결혼을 해버리고 맙니다.
가난에 한이 맺힌 개츠비는 밀주업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기 시작하죠. 결국 막대한 부를 이룬 개츠비는 데이지 집 앞에 저택을 마련하고 밤마다 파티를 열지만, 데이지의 사랑을 얻는 데는 실패합니다. 스포일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결말까지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개츠비는 누군가에게 살해되면서 허망한 삶을 마감합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사회의 시작은 이처럼 허망한 죽음을 양산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부와 성장이라는 장밋빛 그늘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낮에는 자동차로 질주하고, 밤마다 파티가 열리기 시작한 20세기 초 미국은 과연 문명이 존재했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개츠비는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래서 제목도 ‘위대한’ 개츠비인 것일까요.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 하나만으로 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요즘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아니 큰 것을 넘어 거대한 그 무엇을 원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73년 첫 저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출간했던 E. F. 슈마허는 다음과 같은 말로 현대 문명이 봉착한 난관을 뚫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거대주의라는 우상숭배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미덕을 고집하는 게 필요하다. 또한 만일 주제나 목적에 상관없이 작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면,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소비 사회의 진행, 대량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 소비량의 증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의 대규모화와 거대 조직화의 문제 등은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며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상상할 수 없는 진보는, 그 자체로는 진보이지만, 결국에는 파국을 맞게 마련입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SF영화에서 보았던 허구적인 내용들이 단지 허구에 그칠까요. 그것은 과학기술, 즉 문명이라 이름한 모든 것들에 의해 현실이 되고, 결국 우리 삶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영원하다”는 슈마허의 말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못난 현대인들을 위한 금언인 셈입니다.
문명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문명,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과 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물질이 풍족해진 것만큼 우리의 마음이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저 낮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의 존재 의미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명이란 월등한 것도 없고, 하등한 것도 없습니다. 문명이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문명인이라는 착각을 버린 지는 오래입니다. 문명은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문명의 새로운 개념 제시하는 『슬픈 열대』
우리에게 ‘문명’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엉뚱하게도 어릴 적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본방 사수했던 만화 <미래소년 코난>에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코난과 포비가 라나를 도와 흥미로운 모험을 펼쳐나가지만, 실상 만화의 배경은 고도화된 문명으로 피폐해진 지구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기계문명의 정점 ‘인더스트리아’가 통제합니다. 기술 문명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의 생활이 편리하지 않고 오히려 통제를 받습니다. 기술과 더불어 학문과 예술 또한 발전했을 텐데, <미래소년 코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물지 않은 생각의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갑니다.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에 대한 정의가, 그것도 사전적 정의가 올바르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또 다른 관념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문명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바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아마존의 원시부족을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문명이라곤 접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야만인’들이었죠. 하지만 원시부족의 삶을 연구하면 할수록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인들이 야만인이라고 치부한 원시부족의 삶이 전혀 야만스럽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나름의 문화와 규칙들 속에서 그들이 처한 삶을 지혜롭게 개척하고 있었기에 더 문명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카두베오, 보로로, 남비콰라, 카와이브 등 아마존 밀림의 4개 부족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는 그들이 개인의 존엄은 물론 사회적 규칙 등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에, 도리어 놀랍니다. 사실 서구 사람들의 기준에 맞춘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은 허구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고 해서 우리는 저절로 ‘문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삶의 환경을 긍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문명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우리 시대 고전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소위 문명 사회라고 하지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평가받지 않고 ‘가진 것’에 의해 평가받기 일쑤입니다. 천진난만해야 할 초등학생들마저 아파트 평수에 민감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명품 가방, 더 넓은 아파트, 고급 외제 승용차에 스스로의 삶을 저당 잡힌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이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로 평가받는 하나의 ‘물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소위 ‘문명’이 발달한 현대 산업 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은 더 많이 갖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커다란 꿈을 꾸어도 모자란 청소년들에게 학교와 학원 사이를 새벽부터 새벽까지 전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미래…. 부모들은 소박한 꿈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이러한 삶의 패턴은 우리 자녀들을 소유에 집착하는 삶으로 내몰기에 충분합니다. 소유가 많으면 과연 행복할까요. 소유의 끝은 어디일까요. 소유의 끝이 없는데, 감히 행복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이제는 우리도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무한 성장이 아닌 선택적 성장을 지향하며, 물질적 이익보다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이제 시작할 때입니다. 『소유냐 존재냐』는 단순히 철학적 틀거리에서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실험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합니다. 그 대안들이 궁금하다면 지금 곧 서점으로 달려가 보시기 바랍니다.
현대 문명의 폐해 속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 존재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 바로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입니다. 소유하는 삶의 방식은 욕망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착취와 차별, 가난, 불황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은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에서 이처럼 “부도덕”하고 “터무니없는 부조리”한 것들에 반대하고 저항합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의 “밥벌이를 빼앗고 영향력과 신분까지 빼앗으며”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와 메인에서 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조화로운 삶”을 조용히 실천했습니다. 단지 전원의 한가함을 즐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우리가 문명이라 이르는 것들에 대해 반문하고 저항합니다. 스코트 니어링에 따르면 조화로운 삶이란 정해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삶과 역사의 전개, 문명 사회 모두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이지요.
하지만 조화로운 삶을 추구해야 할 오늘날 문명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조화롭지 못한 결과만을 낳고 있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은 이 책에서 “누구라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조화로운 삶을 살 것,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라는 말로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화로운 삶』과 『조화로운 삶의 지속』 등 니어링 부부의 모든 책은 현대 문명이 나아갈 바를, 아니 일상을 대안적 삶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좋은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소유와 존재의 문제에서 갈등하는 사람 중 제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인물은 ‘개츠비’입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개츠비는 오로지 부와 출세를 꿈꿉니다. 어렵사리 만난 상류사회 여성 데이지에 홀딱 빠져버리지만 그녀는 개츠비가 해외 파병된 사이 대대로 부자인 뷰캐넌과 결혼을 해버리고 맙니다.
가난에 한이 맺힌 개츠비는 밀주업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기 시작하죠. 결국 막대한 부를 이룬 개츠비는 데이지 집 앞에 저택을 마련하고 밤마다 파티를 열지만, 데이지의 사랑을 얻는 데는 실패합니다. 스포일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결말까지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개츠비는 누군가에게 살해되면서 허망한 삶을 마감합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사회의 시작은 이처럼 허망한 죽음을 양산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부와 성장이라는 장밋빛 그늘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낮에는 자동차로 질주하고, 밤마다 파티가 열리기 시작한 20세기 초 미국은 과연 문명이 존재했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개츠비는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래서 제목도 ‘위대한’ 개츠비인 것일까요.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합니다.
한때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 하나만으로 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요즘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만큼 우리 시대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아니 큰 것을 넘어 거대한 그 무엇을 원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73년 첫 저서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출간했던 E. F. 슈마허는 다음과 같은 말로 현대 문명이 봉착한 난관을 뚫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거대주의라는 우상숭배로부터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미덕을 고집하는 게 필요하다. 또한 만일 주제나 목적에 상관없이 작은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면,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소비 사회의 진행, 대량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 소비량의 증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의 대규모화와 거대 조직화의 문제 등은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며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상상할 수 없는 진보는, 그 자체로는 진보이지만, 결국에는 파국을 맞게 마련입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SF영화에서 보았던 허구적인 내용들이 단지 허구에 그칠까요. 그것은 과학기술, 즉 문명이라 이름한 모든 것들에 의해 현실이 되고, 결국 우리 삶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영원하다”는 슈마허의 말은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못난 현대인들을 위한 금언인 셈입니다.
문명은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문명,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지식과 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입니다. 생활이 편리해지고 물질이 풍족해진 것만큼 우리의 마음이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저 낮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의 존재 의미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명이란 월등한 것도 없고, 하등한 것도 없습니다. 문명이란 그 자체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문명인이라는 착각을 버린 지는 오래입니다. 문명은 그저 삶의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