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새책 깊게 읽기 - 스토리텔링의 시대, 이야기꾼! 그림책과 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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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7 23:17 조회 8,372회 댓글 0건본문
바야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라 할
만하다. 미래학자 롤프 얀센이 『드
림 소사이어티』에서 예견했듯 이
제 감동을 담은 이야기는 가장 강
력한 홍보와 설득의 수단이 되었
다. 마케팅 측면뿐만이 아니다. ‘스토리텔링 콘서트’라는 새로운 문화적 조류, 개인의 인생사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는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은 우리 사회가 이미 지식정보의 사회에서 감성과 상상력의 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읽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듣거나 영상을 보고, 이성적 판단은 정서적 공감을 동반하며, 고독한 읽기를 넘어 대중적 소통을 추구하게 되면서 우리는 인쇄매체시대의 긴 터널을 지나 인터넷 시대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과 그림, 그리고 낭독이 덧붙여질 때 ‘그림책’이라는 장르는 인터넷 매체가 지배하는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매우 적합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왔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계를 이해해왔다. 구술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이 전면화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피지배계급은 이야기에 꿈을 담아 소원을 성취하려 했으며, 지배계급은 이야기를 통해 계급적 지위를 지속·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민담은 민중이 어떠한 꿈을 꾸었고 삶의 조건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라할 수 있다.
홍대권 이야기는 ‘젖을 먹여 암행어사 살린 여인담’과 ‘겨울에 잉어를 구한 효자담’을 김한유가 독창적으로 스토리를 개편한 것이다(신동흔, 『이야기와 문학적 삶』참조). 탑골공원에서 활약했던 김한유 구연口演의 채록본을 각색한 『모이소, 들어보소, 으라차차 홍대권!』(이하『홍대권!』)의 의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한다.
우선 『홍대권!』은 그림책에 이야기꾼을 등장시킴으로써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선보였다. 이야기꾼은 전면에 등장하여 독자를 이야기판으로 유도하며, 장면을 설명하고, 논평하며 독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를 통해 『홍대권!』은 인쇄매체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일방향성을 극복하고 상호작용성과 현장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옛이야기 그림책은 오래 전부터 입말체의 사용을 통해 구술성을 강화하려 하였지만 서술어의 변형만으로 구술성의 핵심인 이야기의 현장성과 상호작용성을 살리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다만 이야기꾼의 역할이 좀 더 강화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홍대권의 키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참나무를 언급하기보다 버스 타면 모가지를 환풍구 밖으로 내놓아야 할 정도라든지, 김한유의 구연이 그러했듯 이야기 하편은 EBS 뽀로로 후편으로 방영될 것이라는 등의 표현은 어떠한가. 현재의 시공간이 과거를 넘나들며, 화자의 논평이 이야기에 적극 들어갔더라면 언제든지 변형 가능한 구연문학의 특징이 더 잘 구현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홍대권!』은 당대 모순을 적확히 꿰뚫고 이에 저항하되 경계를 넘어 연대하는 주체를 그려냄으로써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유의미한 옛이야기 텍스트라 할 만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억압의 상징적 장소이다. 그런데 홍대권의 아내는 시어머니(가부장의 대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젖을 먹여 두 남성을 살려낸다. 두 생명을 구해낸 여성의 몸은 이제 억압의 장소가 아닌 큰절을 받아 마땅한 위대한 장소가 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준다. 약자의 승리는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에서의 홍대권의 활약상으로도 드러낸다. 지게 작대기 활과 맨몸으로도 사냥과 무술에서 우월함을 보이고, 세상에서 젤로 어렵다는 책을 다 읽고 가마솥에 삶아 먹는가 하면, 박장군의 목을 베라는 임금의 명에도 상투만 자르고 마는 등의 일화를 통해 지배계급보다 우위에 있는 민중의 강한 생명력과 건강한 윤리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가 약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연대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며느리는 남편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홍대권은 어사의 도움으로 궁궐에 입성할 수 있었다. 임금 역시 신분을 떠나 홍대권을 등용한다. 홍대권은 강한 남성성으로 가부장의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계급적 배치 상으로는 약자에 속한다. ‘효’라는 지배적 이념의 자장 안에 있되 시어머니의 명을 거역한 아내의 선택을 지지하고, 임금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박장군의 목숨을 살려준 홍대권에게서 다양한 주체를 가로지르는 유목적遊牧的 주체의 징후를 볼 수 있었다고 하면 무리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홍대권!』의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한지의 질감, 민화풍의 호랑이, 먹을 사용한 자연스럽고 담백한 붓질, 과장된 표현 등이 모두 옛이야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다만 서사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이 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이 있다. 명사형 혹은 서술형의 문장들이 거의 매 장마다 소제목으로 등장하는데, 어떤 효과를 기대했는지도 의문이다. 모처럼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고 알찬 내용으로 무장한 옛이야기 그림책을 만나게 되어서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만하다. 미래학자 롤프 얀센이 『드
림 소사이어티』에서 예견했듯 이
제 감동을 담은 이야기는 가장 강
력한 홍보와 설득의 수단이 되었
다. 마케팅 측면뿐만이 아니다. ‘스토리텔링 콘서트’라는 새로운 문화적 조류, 개인의 인생사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는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 등은 우리 사회가 이미 지식정보의 사회에서 감성과 상상력의 사회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읽기와 더불어 이야기를 듣거나 영상을 보고, 이성적 판단은 정서적 공감을 동반하며, 고독한 읽기를 넘어 대중적 소통을 추구하게 되면서 우리는 인쇄매체시대의 긴 터널을 지나 인터넷 시대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과 그림, 그리고 낭독이 덧붙여질 때 ‘그림책’이라는 장르는 인터넷 매체가 지배하는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매우 적합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는 태곳적부터 존재해왔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계를 이해해왔다. 구술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이 전면화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피지배계급은 이야기에 꿈을 담아 소원을 성취하려 했으며, 지배계급은 이야기를 통해 계급적 지위를 지속·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특히 민담은 민중이 어떠한 꿈을 꾸었고 삶의 조건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라할 수 있다.
홍대권 이야기는 ‘젖을 먹여 암행어사 살린 여인담’과 ‘겨울에 잉어를 구한 효자담’을 김한유가 독창적으로 스토리를 개편한 것이다(신동흔, 『이야기와 문학적 삶』참조). 탑골공원에서 활약했던 김한유 구연口演의 채록본을 각색한 『모이소, 들어보소, 으라차차 홍대권!』(이하『홍대권!』)의 의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한다.
우선 『홍대권!』은 그림책에 이야기꾼을 등장시킴으로써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선보였다. 이야기꾼은 전면에 등장하여 독자를 이야기판으로 유도하며, 장면을 설명하고, 논평하며 독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를 통해 『홍대권!』은 인쇄매체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일방향성을 극복하고 상호작용성과 현장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옛이야기 그림책은 오래 전부터 입말체의 사용을 통해 구술성을 강화하려 하였지만 서술어의 변형만으로 구술성의 핵심인 이야기의 현장성과 상호작용성을 살리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다만 이야기꾼의 역할이 좀 더 강화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홍대권의 키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참나무를 언급하기보다 버스 타면 모가지를 환풍구 밖으로 내놓아야 할 정도라든지, 김한유의 구연이 그러했듯 이야기 하편은 EBS 뽀로로 후편으로 방영될 것이라는 등의 표현은 어떠한가. 현재의 시공간이 과거를 넘나들며, 화자의 논평이 이야기에 적극 들어갔더라면 언제든지 변형 가능한 구연문학의 특징이 더 잘 구현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홍대권!』은 당대 모순을 적확히 꿰뚫고 이에 저항하되 경계를 넘어 연대하는 주체를 그려냄으로써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유의미한 옛이야기 텍스트라 할 만하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억압의 상징적 장소이다. 그런데 홍대권의 아내는 시어머니(가부장의 대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젖을 먹여 두 남성을 살려낸다. 두 생명을 구해낸 여성의 몸은 이제 억압의 장소가 아닌 큰절을 받아 마땅한 위대한 장소가 됨으로써 현실세계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준다. 약자의 승리는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궁궐에서의 홍대권의 활약상으로도 드러낸다. 지게 작대기 활과 맨몸으로도 사냥과 무술에서 우월함을 보이고, 세상에서 젤로 어렵다는 책을 다 읽고 가마솥에 삶아 먹는가 하면, 박장군의 목을 베라는 임금의 명에도 상투만 자르고 마는 등의 일화를 통해 지배계급보다 우위에 있는 민중의 강한 생명력과 건강한 윤리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가 약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연대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며느리는 남편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홍대권은 어사의 도움으로 궁궐에 입성할 수 있었다. 임금 역시 신분을 떠나 홍대권을 등용한다. 홍대권은 강한 남성성으로 가부장의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계급적 배치 상으로는 약자에 속한다. ‘효’라는 지배적 이념의 자장 안에 있되 시어머니의 명을 거역한 아내의 선택을 지지하고, 임금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박장군의 목숨을 살려준 홍대권에게서 다양한 주체를 가로지르는 유목적遊牧的 주체의 징후를 볼 수 있었다고 하면 무리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홍대권!』의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한지의 질감, 민화풍의 호랑이, 먹을 사용한 자연스럽고 담백한 붓질, 과장된 표현 등이 모두 옛이야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다만 서사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이 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이 있다. 명사형 혹은 서술형의 문장들이 거의 매 장마다 소제목으로 등장하는데, 어떤 효과를 기대했는지도 의문이다. 모처럼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고 알찬 내용으로 무장한 옛이야기 그림책을 만나게 되어서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