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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우정이 없다면 태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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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1 10:31 조회 6,84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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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나 ‘내 편’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손 잡아주는 내 편도 필요하고,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을 때 함께 웃어줄 내 편도 필요하지요. 알 수 없는 인생, 그 한가운데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줄 ‘내 편’만 있다면 그것만큼 다행인 일이 또 있을까요. 그래서 인류의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는 “친구란 또 하나의 자신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풍진風塵 세상에서 더불어 한 길을 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우정友情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임에 분명합니다.

『사기』 『삼국지』, 우정을 말하다
친구와의 돈독한 정을 이야기할 때 맨 앞자리에 서는 것은 아마도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관중과 포숙은 춘추전국시대 당시 제나라에서 자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벼슬길에 오른 후 제나라 양공의 두 아들 규와 소백이 왕위를 다투는 사이, 두 사람은 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동생 소백이 군주 자리에 오르고 적진에 몸담았던 관중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포숙은 환공(소백)에게 다음과 같이 간하고 관중을 경卿, 즉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합니다.

“당신이 제나라만을 다스리고자 하면 고혜와 숙아가 있으면 됩니다. 당신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한다면 관이오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오는 어느 나라에 있든 그 나라에서 소중히 여길 인물이니 잃어서는 안 됩니다.”

포숙은 관중을 환공에게 천거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관중의 아랫자리에서 그를 보필한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합니다. 환공과 친구 포숙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관중은 40여 년간 재나라 재상으로 일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개혁을 단행했고 결국에는 제나라를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훗날 관중은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관포지교의 고사는 이렇게 탄생한 것입니다.

동양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사기』에서 사마천이 수많은 영웅과 호걸, 수많은 지혜로운 사람들 사이에 관중과 포숙의 일화를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사마천은 명재상 관중의 현명함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로운 눈을 가졌던 포숙을 더 앞자리에 두고 칭찬합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의 신뢰, 곧 우정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시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요.

관포지교와 함께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이르는 말이 수어지교水魚之交입니다. 수어지교 하면 저는, 광대무변한 책의 세계로 저를 인도한 『삼국지』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량을 세상을 불러내고는 감격에 겨워 “물 만난 고기”에 스스로를 비유합니다. 그 정이 오죽이나 돈독했으면 장비는 쳐들어오는 조조군을 앞에 두고 “물 보고 막으라 하쇼”라며 막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불퉁스러운 장비의 얼굴이 떠올라 엷은 미소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유비와 제갈량은 분명 친구가 아니라 군신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의와 우정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유비는 죽는 순간까지 제갈량을 신뢰하여 후사를 부탁했고, 그 신의와 정성에 감복한 제갈량은 죽는 순간까지 유비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했습니다. 관중을 알아 준 포숙처럼, 제갈량의 재주와 인품을 단박에 알아봐 준 유비의 깊이와 넓이, 높이도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정의 달인, 임꺽정과 친구들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읽노라면 조선시대 하층민들의 고단한 삶이 절절해 때론 책장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때만 되면 『임꺽정』을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안에 무궁한 삶의 진리와 진실이 숨겨져 있고, 또한 헐벗고 굶주렸으나 유쾌한 우정을 쏟아내는 주인공들의 삶이 대견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꺽정은 소백정의 자식이지만, 열심히 일한 흔적은 책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 것도 안하고 놉니다” “얹히어 먹는 것이 편하지”라고 당당히 말하는, 요즘 말로 하면 백수 중의 백수입니다. 요즘 같으면 백수와 친구하자고 할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꺽정은 동류인 백정들과 흉허물 없이 지낼 뿐 아니라 양반 친구 덕순과도 막역하게 지냅니다.

또한 평생지기들, 그러니까 축지법의 도사인 처남 천왕동이, 이십대를 앉은뱅이로 보냈으나 댓가지(표창)의 달인인 유복, 돌팔매 고수 돌석, 힘이 장사인 곽오주와 막봉이 등과는 간과 쓸개를 빼줄 정도로 진한 우정을 나눕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의 월북으로 『임꺽정』을 정치적으로 읽으려 하는 불순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실은 『임꺽정』은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던 사내들의 끊을 수 없는 우정을 담아낸 작품인 셈입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 친구란 한가할 때 만나 수다 떨고 쇼핑하고 회식하는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주고받는 관계를 의미한다. 즉 거창한 이념에 입각하여 우정과 의리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을 친구와 함께 하다 보니 친구 없이는 살 수가 없고, 그래서 친구를 위해선 부귀공명도,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협任俠의 우정, 소설 속의 우정이 아닌, 우정의 삶을 살아낸 철학자와 작가도 있습니다. 20세기 지성계의 두 거인, 장 폴 사르트르와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지성적 우정의 본보기를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만난 적도 없는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호의를 보이면서 만남을 준비합니다. 카뮈는 사르트르의 『구토』와 『벽』에 대한 서평을 썼고, 사르트르는 카뮈의 『이방인』을 호평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만나게 되고, 우정은 점점 돈독해져만 갑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선의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카뮈가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앞서가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지성계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우정은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51년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출간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삐걱거립니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투쟁을 다룬 『사르트르와 카뮈』는 파국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프랑스의 해방 이후 줄곧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정의’와 ‘중용’을 추구했던 카뮈와 한때 공산주의 동반자가 되어 ‘폭력’과 ‘혁명’을 주창했던 사르트르 사이에는 이미 상당한 틈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 냉전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 틈은 점차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민족이 갈라진, 아니 부모와 처자, 형제마저 갈라놓은 이념의 대립 현장인 한반도에서 카뮈와 사르트르의 우정과 결별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때론 이념과 가치관이 우정을 키우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때는 한때의 우정을 뒤로 하고 철천지원수가 되게 하는 것도 바로 이념입니다.

예수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해 자살한, 그래서 수많은 유럽 청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오해를 받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불멸의 고전이며 ‘우정’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절절한 사랑과 그것으로 승화된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서 어떤 우정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느냐고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주인공 베르테르가 친구인 빌헬름에게 보낸 우정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베르테르는 친구의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즉 한 사회에서 매장당하고도 남을 이야기를 친구에게 솔직하게 풀어냅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전해주는 편지는 그야말로 친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인 로테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낸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보면, 그만큼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솔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자살하고자 하는 자신의 속마음까지 고백합니다. 자살을 미화하거나 옹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쩌면 베르테르는 때로는 메모 수준의, 때로는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그 고백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젊은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낸 80여 통의 편지는, 말 그대로 우정과 신뢰의 기록인 셈입니다.

이야기를 신화의 세계로 돌려볼까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들의 세계에서 마치 들러리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프로메테우스 정도가 사람들에게 서글픔을 느껴 불을 전해줄 뿐, 대다수의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만이 온전하다고 여기며 그곳에서 갇혀 지냅니다. 이처럼 대다수의 신화와 종교에서 신들은 인간과는 거리감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신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며, 스스로를 모든 인간의 친구라고 선포한 신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2명의 제자가 예수를 부를 때만 해도 예수의 호칭은 “주와 또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인간을 친구라 부르며 먼저 손 내미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라며 십자가의 제물로 자신의 몸을 내어줍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 신과는 조금 다른, 아니 파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미묘한 관계는, 어쩌면 우정에 기초한 전적인 신뢰가 그 밑바탕에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서』, 그중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사복음서」는 교양적 소양을 위해서라도 꼭 읽어봄직한 책입니다.

참된 우정,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는 것
우정은 기쁨의 순간은 물론 슬픔과 고통의 순간에도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괴테는 “인생에서 우정을 없앤다는 것은 세상에서 태양을 없애는 것과 같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정을 맺는 방법이 아닐까요. “충고하여 벗을 선도하고, 듣지 아니하면 곧 중지하여,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는 것이 참된 우정”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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