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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공부’의 광대무변한 세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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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1 16:13 조회 6,47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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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최대 관심사이자 당면 과제는 단연 ‘성적’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소위 ‘명문’ 대학에 가기 위해 우리 청소년들은 새벽부터 새벽까지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방황 아닌 방황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청소년들은 ‘공부’ 소리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지겹고 고통스럽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 바로 요즘 ‘공부’의 자화상입니다.

공부, 흥미 유발에서 시작
그렇다면 공부는 원래부터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위대한 사상을 일군 철학자들이나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거둔 학자들은 모두 지겨움과 고통스러움을 이겨낸 사람들일까요. 물론 학문에 정진하는 시간은 지난至難한 수련의 과정인 것이 분명합니다. 때론 시행착오를 거듭하기도 하거니와 좌절할 때도 많지요. 하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분야를 막론하고 대가大家와 태두泰斗들은 학문하는 것 자체, 즉 공부하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물리학자이며 온생명 사상가로 유명한 장회익 서울대 물리학과 명예교수는 『공부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공부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어서, 정상적으로는 이것이 즐거움을 줄지언정 고통을 안길 이유가 없다.”

그렇습니다. 공부는 원래 즐거움을 주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장회익 선생은 “잘못된 공부 방식과 왜곡된 교육 제도 때문에 공부라는 것이 결국 끝없는 압력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등만 살아남는다는 오도된 가치관을 전파하는 교육,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공부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는 셈입니다.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는 학문의 길에 들어서려는 초학자初學者들을 위해 『근사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근사近思’란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라는 뜻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나의 몸 가까운 데서 출발해 깊은 이치에까지 미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희는 재미있게도 “참된 공부의 방법과 내용은 흥미 유발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주자학이 어떤 학문입니까. 중국 사상계를 아우르며, 이 땅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근엄함의 상징과도 같은 학문 아니던가요. 그런 ‘주자학’을 집대성한 사람이 공부와 흥미를 동격으로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치를 말해주면, 들어도 깊이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치를 무시하게 된다.”

학문은 심오한 것이지만, 그 심오함으로 들어서기 위한 작은 관심은 흥미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공부가 흥미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앎의 즐거움은 언감생심, 단순한 암기와 적용만으로 시험 문제 하나 더 맞히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교육보다, 획일적 교육 내용과 방법이라는 손쉬운 선택이 결국 공부와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 진리에 통달한 성인을 꿈꾸다
유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꽃을 피운 것은 조선입니다. 그 중심에 퇴계 이황과 같은 이가 있습니다. 사실 유학은 진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실천의 학문이 바로 유학입니다. 퇴계는 노년에 『성학십도』라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바칩니다. 왕에게 바칠 책이니 퇴계가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할 만합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퇴계가 타계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니 퇴계의 평생 삶과 학문이 집약되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퇴계는 진리의 학문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는데, 공부의 중요한 이유가 “진리에 통달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저 마음은 방촌方寸에 갖추어져 있지만 매우 ‘텅 비고 신령한’ 것이요, 진리는 그림과 해설에 나타나 있어 매우 ‘뚜렷하고 알찬’ 것입니다. 매우 텅 비고 신령한 마음으로 매우 뚜렷하고 알찬 진리를 구한다면 얻지 못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여 얻고’, ‘사려가 밝게 되어 진리에 통달한 성인이 됨’을 어찌 오늘날이라고 징험徵驗할 수 없겠습니까?”

퇴계가 말한 성인을 범접하기 어려운,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퇴계가 말한 성인은 일상생활을 살아내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입니다. 퇴계는 “대저 도道는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유행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없는 곳이 없다”면서 “이理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냐.”라고 반문합니다. 또한 “잠깐 사이에도 정지하지 않으므로 순식간도 이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냐.”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공부는 영어 단어 하나 잘 외고, 수학 문제 하나 더 잘 푼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시간이나 공간이든, 우리 삶과 생활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공부의 과정인 것이죠.

한편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였던 성호 이익은 ‘회의정신’을 공부하는 요체로 꼽았습니다. “작게 의심하면 작게 진보하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한다”는 게 성호의 생각입니다. 『성호사설』에서 그는 매사에 의문을 갖는 습관을 들일 것을 강조합니다.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큰소리치지만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기존 가치에 세뇌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입관 혹은 편견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호는 사소한 것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의문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호 이익이 요즘 말로 회의주의자나 부정적이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단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성호는 절대 긍정도 절대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사물의 이치와 학문의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퇴계 이황과 성호 이익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일상생활에서의 깨우침을 강조했던 것이죠. 유학과 실학이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대립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을 깨우치는 공부에는 유학과 실학의 경계가 없음을 퇴계와 성호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우스트와 데미안이 안내하는 공부의 길?
‘공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조금 생뚱맞은 책이 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입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파우스트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학문과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파우스트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과 우주의 비밀을 풀고도 싶었고, 인생 최고의 향락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했습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때론 정신적인 고결함이기도 했고, 때론 한없는 육체의 향락이기도 했습니다.

종국에는 파우스트가 악마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학문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탐구 정신만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문학과 철학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유한한 삶이 직조해내는 삶의 무한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파우스트의 생각과 체험은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인류 전체의 삶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지만, 파우스트는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 즐거움이 더 큰 열망과 욕망을 낳았습니다. 파우스트가 최고의 미녀 헬레나에 이끌려 지옥에 갔다고 해서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열망과 욕망, 즉 공부의 결과물들이 오늘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우리의 앞으로의 삶도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퇴계는 학문을 닦는 중요한 이유가 성인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말한 대목 기억하시지요. 서양 문학에서도 성인에 이르기 위해 구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데미안』의 첫 구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세는 주인공 데미안을 통해 추상적 인식의 영역이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작품 내내 고민합니다. 성서 속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모호한 관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도둑의 삶 등등이 기존에 알고 있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라 때론 놀라기도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헤세는 읽는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그야말로 참된 공부의 길을 제시합니다. 데미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세계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소수에 지나지 않죠. 이 같은 이치를 깨닫게 되면, 즉 자기에게로 이르는 끊임없는 공부만이 우리를 인간되게 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데미안은 비판적 인식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첫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성호 이익의 회의정신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으로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공부의 길은 동서도 없고 고금도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

온전한 인간의 길을 안내하는 공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어느 시에선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 또한 있느니라.”라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뚱딴지같지만, 저는 이 시가 오늘 우리의 공부를 새롭게 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공부 방법과 왜곡된 교육 제도로 인해 공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지겨움 혹은 괴로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이 팽배한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가 아닐까요. 시장에 내던져진 교육과 공부를 바꾸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대학입시로 대표되는 우리의 교육을 바꾸는데 꼭 과격한 ‘혁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희가 주장한 것처럼 공부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퇴계의 말처럼 일상생활에서 성인, 요즘 말로 ‘생활의 달인’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물론 성호 이익이 가졌던 회의정신을 품는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더욱이 파우스트와 데미안처럼 스스로의 열정과 욕망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공부의 의미는 새롭게 각인될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 공부는 학생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은 모두 공부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공부라는 광대무변한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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