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읽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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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2 16:48 조회 6,457회 댓글 0건본문
오늘도 무언가를 읽습니다. 그것이 길을 지나며 보는 무질서하게 널려진 간판일 때도 있고, 어느 신문의 사설 한 토막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림도 제 마음의 독법으로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곤 합니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책과 독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인간됨을 증명하는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나는 읽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읽는다는 것은 지상 최대의 행복이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읽는다는 것,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
세상만사를 모두 읽는다지만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것만큼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리고 미래적인 일은 없는 듯합니다. 우리가 읽는 책에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읽는다’는 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또 앞으로 우리의 일상을 어떤 모습으로 변주해 나갈까요. 책을 소재로 한 책 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에서 이광주 선생은 ‘읽는다’는 것이 가진 광대무변한 세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책이라는 오묘한 지知의 존재 양식을 통해 나의 삶에 눈을 뜨고 세계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 나오는 그 공간은 나의 정념과 세계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이다. 어디 그뿐일까. 어린 시절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겼다. 그것은 분명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단순해 보이는 읽는다는 행위가 ‘일탈의 음모’와 ‘꿈의 놀이’가 공존하는, 궁극에 가서는 ‘수태의 성별된 시간이요 공간’이라니요. 고대 이집트인들의 말마따나 “책의 집은 영혼의 치유장”인가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고, 지식이 아닌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와도 같은 일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이자 백과전서 『지봉유설』을 쓴 지봉芝峰 이수광은 “몸가짐이 승검하고 놀이와 사치를 싫어하며 44년간 벼슬하는 동안 출처와 언행에 티가 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입니다. 이수광이 이처럼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로 삶을 점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수광은 시문집 『지봉집』에서 읽는다는 것이 삶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현의 책이 내 벗이요, 내 마음이 엄한 스승이므로, 마음을 경건하고 독신하게 다스리는 것이 스승을 섬기는 일이다.”
읽는다는 것, 황홀경으로 가는 좁은 길
『데미안』의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책을 일러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읽는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중 「독서의 마력」이라는 글에서 헤세는 소수만, 즉 진정한 독자만이 “철자와 단어의 그 특별한 경이에 여전히 매료당한 채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특별한 경이 역시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이 아니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개개의 독자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경험”합니다. 결국 읽는다는 행위는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이며, 오롯이 혼자만의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참 좁은 길입니다.
그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를 즐겼던 사람이 독일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니츠키는 “문학은 재미있어야 하고, 비평은 명료해야만 한다.”라는 명제 아래 고전古典이나 거장巨匠이라는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때론 독설과 야유로, 하지만 평이하고 명쾌한 글로 ‘읽는다’는 것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줍니다.
특히 『내가 읽는 책과 그림』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와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귄터 그라스 등 유명 작가들의 초상화를 매개로 그들의 작품세계를 면밀하게 읽어냅니다. 한 장의 초상화에서 읽어낸 작가들의 작품은 그야말로 자유자재, 종회무진입니다. 라니츠키는 그림도 읽어내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울러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를 통한 황홀경의 세계를 적확한 묘사와 자유로운 필치로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라니츠키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내가 읽은 책과 그림』 『사로잡힌 영혼』만으로도 ‘읽는다’는 것의 깊고 오묘한 맛을 전해주고 있으니,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읽는다는 것, 현명한 이들을 위한 삶의 양식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한 지역이나 한 시대에 국한된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일이며, 감히 세상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대 집단지성의 향연”이라 일컬어지는 『회남자』 「설림훈」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활쏘기를 익히는 사람은 기예技藝를 잊고, 책 읽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도 잊는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이 사랑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그러나 한나라 무제 시기의 회남왕 유안은 ‘읽는다’는 행위가 사랑마저 초월하는 숭고한 가치임을 역설합니다. 강력한 권력 아래 영토뿐 아니라 ‘정신’마저 하나로 통일하려는 기운이 넘쳤지만 유안은 다양한 목소리가 약동하는 세상을 꿈꾸며 미래의 향방을 새롭게 모색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읽는다’는 행위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 진면목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장자』에는 ‘독서망양讀書亡羊’이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흔히 “다른 일에 정신을 팔다가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다.”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지만, 저는 이 고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인 장과 하녀 곡이 모두 양을 잃어버립니다. 곡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읽어버리고, 장은 대나무에 쓰인 글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리죠. 곡이 놀이에 정신이 팔려 양을 잃고, 장은 책을 읽다가 잃어버렸으니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장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읽다가 내려야 할 역에서 제때 내리지 못해 막차를 타고서야 돌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자』의 ‘독서망양’을 부정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것은 아마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곡진曲盡한 일일 것입니다.
한편 『노자』는 “남을 아는 사람은 총명하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남을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읽는다’는 행위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마음을 읽는다.”라고 말합니다. 남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또한 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마음을 읽는 것은 여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삶의 높은 경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옛 사람들의 말씀, 즉 고전을 읽어야 하고, 거기서 마음의 본래 자리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장자』와 『노자』, 아니 우리가 스승이라 부를 만한 모든 이들은 ‘읽는다’는 것을 신성하게 여겼고, 그것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읽는다는 것, 삶에 자유를 주는 흔치 않은 경험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킴에 있어 무엇보다 “눈에 의한 감각적인 사랑”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조금 단순하게 표현하자면,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모든 관념과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표현됩니다. 관념이 곧 영상인 것이죠.
생뚱맞지만 그래서 생각난 책이 바로 페터 회의 장편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입니다. 구름과 눈, 얼음의 세계를 몽환적으로 떠도는 듯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스밀라가 보는 세상은 ‘읽는다’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변을 유유히 맴도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도 기실 ‘읽는다’는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세계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장 흔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눈과 보는 것, 그것을 이용해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함수로 묶여 있는지 궁금하다면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필독서의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읽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능동적인’ 받아들임입니다. 그것이 책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상관없이 우린 그것을 읽어냅니다. 읽어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며 해석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됩니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의 마음을 읽어내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읽어내며 하나의 해석을 우리가 탄생시키는 것이죠.
문학비평에 있어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현우 씨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이 말을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는 독자가 ‘채워 넣는’ 것이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읽는 것은, 그것을 써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해석하고 삶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읽는다’는 행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자유를 부여하는 흔치 않은 경험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하며 “시인의 인상과 시적 언어 고유의 상징에 주목한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내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읽는다’는 것은 ‘내’가 있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자리에 음악이 들어가도 무방하고, 그림이 들어가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것들 모두 온전하게 우리가 ‘읽는다’는 성스러운 행위를 통해 삶의 자리로 치환시켜야 할 것들인 셈입니다.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오늘 여행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읽는다는 것,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
세상만사를 모두 읽는다지만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것만큼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그리고 미래적인 일은 없는 듯합니다. 우리가 읽는 책에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읽는다’는 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또 앞으로 우리의 일상을 어떤 모습으로 변주해 나갈까요. 책을 소재로 한 책 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에서 이광주 선생은 ‘읽는다’는 것이 가진 광대무변한 세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책이라는 오묘한 지知의 존재 양식을 통해 나의 삶에 눈을 뜨고 세계와 처음 만났다.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 나오는 그 공간은 나의 정념과 세계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이다. 어디 그뿐일까. 어린 시절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겼다. 그것은 분명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단순해 보이는 읽는다는 행위가 ‘일탈의 음모’와 ‘꿈의 놀이’가 공존하는, 궁극에 가서는 ‘수태의 성별된 시간이요 공간’이라니요. 고대 이집트인들의 말마따나 “책의 집은 영혼의 치유장”인가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고, 지식이 아닌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와도 같은 일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이자 백과전서 『지봉유설』을 쓴 지봉芝峰 이수광은 “몸가짐이 승검하고 놀이와 사치를 싫어하며 44년간 벼슬하는 동안 출처와 언행에 티가 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입니다. 이수광이 이처럼 지혜로 인도되는 성스러운 행위로 삶을 점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책을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수광은 시문집 『지봉집』에서 읽는다는 것이 삶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현의 책이 내 벗이요, 내 마음이 엄한 스승이므로, 마음을 경건하고 독신하게 다스리는 것이 스승을 섬기는 일이다.”
읽는다는 것, 황홀경으로 가는 좁은 길
『데미안』의 위대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책을 일러 “인간이 자연에게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읽는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중 「독서의 마력」이라는 글에서 헤세는 소수만, 즉 진정한 독자만이 “철자와 단어의 그 특별한 경이에 여전히 매료당한 채 살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특별한 경이 역시 모두에게 동일한 모습이 아니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보이며, 개개의 독자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경험”합니다. 결국 읽는다는 행위는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이며, 오롯이 혼자만의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참 좁은 길입니다.
그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를 즐겼던 사람이 독일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니츠키는 “문학은 재미있어야 하고, 비평은 명료해야만 한다.”라는 명제 아래 고전古典이나 거장巨匠이라는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때론 독설과 야유로, 하지만 평이하고 명쾌한 글로 ‘읽는다’는 것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줍니다.
특히 『내가 읽는 책과 그림』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와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귄터 그라스 등 유명 작가들의 초상화를 매개로 그들의 작품세계를 면밀하게 읽어냅니다. 한 장의 초상화에서 읽어낸 작가들의 작품은 그야말로 자유자재, 종회무진입니다. 라니츠키는 그림도 읽어내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울러 내밀한 자기와의 대화를 통한 황홀경의 세계를 적확한 묘사와 자유로운 필치로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라니츠키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내가 읽은 책과 그림』 『사로잡힌 영혼』만으로도 ‘읽는다’는 것의 깊고 오묘한 맛을 전해주고 있으니,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읽는다는 것, 현명한 이들을 위한 삶의 양식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한 지역이나 한 시대에 국한된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일이며, 감히 세상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대 집단지성의 향연”이라 일컬어지는 『회남자』 「설림훈」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활쏘기를 익히는 사람은 기예技藝를 잊고, 책 읽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도 잊는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것이 사랑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그러나 한나라 무제 시기의 회남왕 유안은 ‘읽는다’는 행위가 사랑마저 초월하는 숭고한 가치임을 역설합니다. 강력한 권력 아래 영토뿐 아니라 ‘정신’마저 하나로 통일하려는 기운이 넘쳤지만 유안은 다양한 목소리가 약동하는 세상을 꿈꾸며 미래의 향방을 새롭게 모색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읽는다’는 행위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 진면목이 다시금 조명되고 있는 『장자』에는 ‘독서망양讀書亡羊’이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흔히 “다른 일에 정신을 팔다가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한다.”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지만, 저는 이 고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인 장과 하녀 곡이 모두 양을 잃어버립니다. 곡은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읽어버리고, 장은 대나무에 쓰인 글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리죠. 곡이 놀이에 정신이 팔려 양을 잃고, 장은 책을 읽다가 잃어버렸으니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장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읽다가 내려야 할 역에서 제때 내리지 못해 막차를 타고서야 돌아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자』의 ‘독서망양’을 부정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것은 아마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곡진曲盡한 일일 것입니다.
한편 『노자』는 “남을 아는 사람은 총명하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남을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읽는다’는 행위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마음을 읽는다.”라고 말합니다. 남은 아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것 또한 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마음을 읽는 것은 여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삶의 높은 경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읽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옛 사람들의 말씀, 즉 고전을 읽어야 하고, 거기서 마음의 본래 자리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장자』와 『노자』, 아니 우리가 스승이라 부를 만한 모든 이들은 ‘읽는다’는 것을 신성하게 여겼고, 그것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읽는다는 것, 삶에 자유를 주는 흔치 않은 경험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킴에 있어 무엇보다 “눈에 의한 감각적인 사랑”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조금 단순하게 표현하자면,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모든 관념과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표현됩니다. 관념이 곧 영상인 것이죠.
생뚱맞지만 그래서 생각난 책이 바로 페터 회의 장편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입니다. 구름과 눈, 얼음의 세계를 몽환적으로 떠도는 듯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 스밀라가 보는 세상은 ‘읽는다’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변을 유유히 맴도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도 기실 ‘읽는다’는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세계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장 흔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눈과 보는 것, 그것을 이용해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함수로 묶여 있는지 궁금하다면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필독서의 제일 첫 자리를 차지해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읽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능동적인’ 받아들임입니다. 그것이 책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상관없이 우린 그것을 읽어냅니다. 읽어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며 해석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됩니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의 마음을 읽어내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읽어내며 하나의 해석을 우리가 탄생시키는 것이죠.
문학비평에 있어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이현우 씨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이 말을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는 독자가 ‘채워 넣는’ 것이 된다.”라고 해석합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무언가를 읽는 것은, 그것을 써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해석하고 삶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읽는다’는 행위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에 자유를 부여하는 흔치 않은 경험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하며 “시인의 인상과 시적 언어 고유의 상징에 주목한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스테판 말라르메는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내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읽는다’는 것은 ‘내’가 있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자리에 음악이 들어가도 무방하고, 그림이 들어가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것들 모두 온전하게 우리가 ‘읽는다’는 성스러운 행위를 통해 삶의 자리로 치환시켜야 할 것들인 셈입니다.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오늘 여행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