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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예술을 찾아 떠나는 일상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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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4 21:37 조회 6,4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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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말이 흔하디흔한 세상입니다. 춤바람이 난 사람들도 “예술한다”고 말하는 세상이고, 하다못해 도둑질도 예술로 표현하곤 합니다. ‘문화’라는 말이 귀에 걸면 귀고리이고 코에 걸면 코고리이듯, 예술이라는 말도 숱한 말들과 조합되면서 원래의 뜻과는 다른 뜻으로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럼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과 거장들의 그림만이 예술이라는 말로 치장할 수 있는 걸까요. ‘예술’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상의 변용이 곧 예술이다
사실 ‘예술’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입니다. 그것이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죠. 숱한 단어와 자의적으로 조합해서 사용되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겁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전인 『보리국어사전』은 예술을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글, 그림, 소리, 몸짓들로 아름답게 나타내는 일. 문학, 미술, 음악, 춤, 연극, 영화 같은 것이 있다.”라고 정의합니다. 나타내는 형태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고 느낀 것”입니다. 생각하고 느낀 것이 없다면 글과 그림, 소리, 몸짓 등으로 표현될 리도 없고, 그것이 문학과 미술, 음악, 춤, 연극, 영화와 같은 형태로 완성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예술, 아니 “생각하고 느낀 것”은 영원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생각하고 느낀 것은 찰나적 시간의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웃음』의 저자 문광훈의 말마따나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영원성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이유일 것입니다.

사실 예술이란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눈으로 목도하는 흔하디흔한 현상, 즉 일상은 매순간 변화하지만, 그 현상 구석구석에 플라톤적 ‘형상(eidos)’이 숨어 있습니다. 예술의 궁극적인 지향점인 “아름답게 나타내는 일”은 인간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역설 아닌 역설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예술적 차원에서 일상을 이해한 사람이 미국의 미술비평가이자 철학자인 아서 단토입니다. 아서 단토는 특히 예술철학에 깊이 천착했는데, 그의 물음은 언제 “무엇이 어떤 것을 예술로 만드는가”에서 시작됩니다. 국내에 소개된 몇 안 되는 아서 단토의 저서 중 『일상적인 것의 변용』은 단토가 이해하는 예술의 개념을 집약적으로 정리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것의 변용』을 읽는 것은 끝없는 인내와 그에 상응하는 공부를 요합니다. 인내와 공부가 바탕이 된다고 해도 단토가 말한 예술의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철학사조가 등장할 뿐 아니라 고금古今을 자유자재로 왕래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질문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술작품이란 예술가 자신, 곧 예술가의 개성으로서의 스타일”이라고 정의한 사실입니다.

물론 이 도식은 아서 단토의 예술에 대한 정의와 철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것처럼 “예술가의 개성으로서의 스타일”이라고 예술을 정의할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예술가만이 개성으로서의 스타일을 지닌 것이 아니라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개성으로서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서 단토가 이 책의 제목을 “일상적인 것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이라고 명명하지 않았을까요.

일상의 변용인 예술, 다시 일상에 영향을 주다
인류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는 비록 생존을 위한 몸짓이었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예술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투박한 그릇으로만 여겨졌던 조선의 백자가 오늘에 이르러 명품 대접을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어느 물건도 후대에 이르러 예술로 대접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양의 일상사가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설명한 작품입니다. 구석기 동굴벽화에서 20세기 영화예술에 이르는 서양의 문화를 독특한 관점에서 정리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헝가리 출신의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예술을 사회와 경제보다 하위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우저가 “모든 예술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져 있지만 예술의 모든 측면이 사회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예술은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지만 그 자체로 독특한 사상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위대한 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예술론』에서 예술 그 자체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예술 이전의 세계에 대한 정의도 명쾌하게 보여줍니다. 작가이기 전에 식물학은 물론 해부학과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괴테입니다. 그러한 저력이 결국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남을 만한 문학작품, 즉 예술을 완성한 것이겠지요. 그런 괴테는 예술과 예술 이전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술은 그것이 아름다움에 이르기 전에는 오랫동안 조형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진실하고 위대한 예술, 아니 때로는 미적 예술 자체보다도 더 진실하고 위대한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조형적 천성이란 게 있어서, 인간이 생존의 위험을 벗어나는 즉시 그것이 활동을 개시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간의 천성이라는 게 괴테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대문호이자 위대한 철학자의 생각에 아주 조금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생존의 위협을 벗어나는 즉시 인간의 조형적 천성이 활동을 개시한다고 했지만, 인간의 생존의 위협 가운데서도 예술적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아닐까요. 구석기 동굴벽화가 그랬고, 20세기 초반 아우슈비츠의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인간은 예술과 지적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발현하곤 했습니다.

물론 괴테는 통합적 사고의 소유자였습니다. “특정적 예술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예술”이라고 천명했지만, 그러한 속성이 다시금 주위에 영향을 미치면 “그것은 거친 야성에서 생긴 것이든, 교양 있는 감상에서 생긴 것이든 온전하고 생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일상에서 변용된 것이지만, 그것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온전하고 생기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술의 진정한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혜곡 최순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예술’은 서양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동양적인 것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었고, 특히 한국적인 것은 딛고 일어서야 하는, 일종의 배격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유행하는가 하면, 세계 곳곳에서, 특히 문화의 원류라는 유럽에서까지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비록 걸그룹들을 앞세운 말초적 수준의 한류이기는 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마저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만들어낸 예술의 경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고, 보살피며 전파하고자 했던 혜곡 최순우 선생입니다. 혜곡 선생의 글을 가려 묶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의 책머리에는 최순우 선생의 아름다움 삶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혜곡은 젖몸살을 앓았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대신 생육했다. 낳았다고 다 어미는 아니다. 버려진 채 돌봐 줄 이 없는 우리 것이 지천이다. 그것을 거두고, 일일이 젖을 먹이며, 그는 젖몸살을 앓았다. 그의 수유로 우리 것은 겨우 눈을 떴다.”

오늘 우리 출판가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우리 땅에 대한 관심과 문화유산답사기는 기실 혜곡 선생의 젖몸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선친先親의 서가에 오롯이 자리했던 『최순우 전집』이 헤아릴 수 없는 이사와 무관심으로 사라지고서야 그 소중함이 절절함은 왜일까요. 서울과 수도권의 헌책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던 신산辛酸함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픕니다.

『최순우 전집』의 허전함을 다소라도 채울 수 있는 몇몇 책이 서가에 있음은 다행입니다. 특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전집에서 추려낸, 말 그대로 주옥같은 글들이 시종 읽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우리 회화와 도자, 조각, 건축 등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빼어난 안목을 더욱 빛나게 하는 유려한 문장 또한 날렵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노라면 『최순우 전집』의 빈자리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번지, 조용한 골목길 한쪽에 자리 잡은 ‘최순우 옛집’을 찾아 아쉬움을 덜어볼까 합니다.

일상의 예술을 즐길 시간
수많은 예술작품 중 문학이 드러내는 아름다움만한 것도 드뭅니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또한 감각과 기억의 흐름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을 우리는 흔히 고전古典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종교학의 태두泰斗 정진홍 선생은 『고전, 끝나지 않는 울림』에서 “어떤 책을 평가하는 데는 그것이 되풀이해서 읽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척도는 없을 듯합니다.”라는 말로 고전을 정의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되읽음’을 충동하는 긴 여운, 끝내 그 여운을 지울 수 없는 아련한 유혹을 내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어떤 ‘처음 읽음’의 경험, 그리고 그것에 대한 회상,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되읽음’ 속으로 들어가 침잠하는 일, 이러한 일련의 구조가 이른바 ‘고전’을 마침내 일컫게 하고, ‘고전 읽기’의 문화를 일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비롯한 고전만 이런 것일까요. 가만 생각해 보면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적 활동이 이러한 과정과 경험을 수반합니다. 그 경험은 우리 일상의 것이고, 마침내는 우리 삶을 통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예술,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처음 경험과 그것을 다시 향유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결국 예술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이 예술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예술이자 역사이며, 세계가 돌아가도록 돕는 하나의 중심축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예술을 대하는 조금의 여유 공간이 생기셨습니까. 그럼 심호흡 한 번 하고, 모두 일상의 예술을 즐겨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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