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오늘을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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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7 22:34 조회 6,995회 댓글 0건본문
개밥바라기별이라니! 재미있는 이름이다. 이 작품은 누구나 젊은 날에 해봄직한 답이 없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방황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작가 황석영은 젊은 날의 자신의 방황을 추억하며 독자들에게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는다.
처음 『개밥바라기별』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황량한 내 내면의 풍경이었다. 준이의 여자친구가 말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입하는 준이의 고민과 방황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준이가 마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지만, 누구보다 치열한 준이의 고민이 나의 가슴에 박혔고, 준이를 응원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자신이 해오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상처의 흔적은 영혼이 성장한 기록
준이의 어린 시절의 풍경은 밝지 못했기에 고민들은 무척 아프고 섬세하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억척스럽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어머니 아래에서 홀로 세상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고, 학교는 낯설게만 느껴져 뛰쳐나가 친구와 방황하기도 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황석영의 성장기를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하지만, 황석영은 이 시기를 결코 어둡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는 “젊은 날 상처받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그 시절을 아름답다 얘기할 수 있을까?”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듯하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흉터로 남아 우리 기억의 한 자락에 머무른다. 머물러서 우리를 채우는 또 다른 바탕이 된다. 그 흉터는 지난날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나이다. 상처의 흔적은 영혼이 성장한 기록이다. 언젠가 우리는 그 흔적을 다시 되돌아볼 것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고,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 그럴것이다.
누구나 십대에 방황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세상이 두렵고, 그 막연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역시 두려움을 부추긴다. 그래서 자학하고 헤맨다. 마침내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 두려움은 피할 수 없기에 이겨내야 한다. 그 싸움은 아프기에 성장통이라고 부르고, 이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나도 성장통을 호되게 겪고 있다. 고치를 벗어나야 나비가 되듯이, 껍질을 깨고 나와야 세상을 보는 병아리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절 자신을 그토록 짓누르던 고민들도 되돌아보면 그저 작은 점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던 물음들도 결국은 각자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뜻일까? 젊은 날의 기억은 그래서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일까?
간절함 품고 오늘을 살아가기
황석영은 청춘의 아픔을 따스하게 보듬는다. 방황하는 준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이 너에게 소중하게 남을 것이고, 그 아픔도 결국 그리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날의 준이들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성장통을 겪고, 그 아픔을 품어냈던 자신처럼 우리 세대들도 그것을 보듬으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준이가 베트남으로 간 것은, 그것을 이겨냈기에, 혹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슬픔과 죽음, 그리고 아픔이 공존하는 그 땅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보듬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전장은 자기 자신의 상처와 고독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곳이기에 그곳으로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준이는 자유를 꿈꾸고 긴 여행을 떠난다. 황량한 길로 자신을 내모는 것이다. 그 길은 그가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길의 시작이다. 거기서 그는 깨닫는다. 삶은 그 자체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걸. 숱한 방황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그 찬란함이 눈부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의 자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매 순간 순간의 생생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정말 축복일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법, 그것을 누가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순간은 영원이 아니다.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순 없지만, 그 순간을 자신의 길을 걸으며 온전히 살아낼 수는 있다. 이 소설은 그래서 잊지 못할 문장으로 말한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싱싱하고 간절한 삶을 살아보라고. 나는 이 말이 우리 세대에게 보내는 황석영의 응원처럼 들렸다.
처음 『개밥바라기별』을 접했을 때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황량한 내 내면의 풍경이었다. 준이의 여자친구가 말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입하는 준이의 고민과 방황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준이가 마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지만, 누구보다 치열한 준이의 고민이 나의 가슴에 박혔고, 준이를 응원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자신이 해오던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상처의 흔적은 영혼이 성장한 기록
준이의 어린 시절의 풍경은 밝지 못했기에 고민들은 무척 아프고 섬세하다.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억척스럽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어머니 아래에서 홀로 세상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고, 학교는 낯설게만 느껴져 뛰쳐나가 친구와 방황하기도 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런 황석영의 성장기를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하지만, 황석영은 이 시기를 결코 어둡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는 “젊은 날 상처받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그 시절을 아름답다 얘기할 수 있을까?”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듯하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흉터로 남아 우리 기억의 한 자락에 머무른다. 머물러서 우리를 채우는 또 다른 바탕이 된다. 그 흉터는 지난날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나이다. 상처의 흔적은 영혼이 성장한 기록이다. 언젠가 우리는 그 흔적을 다시 되돌아볼 것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고, 이 글을 읽는 사람 누구나 그럴것이다.
누구나 십대에 방황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세상이 두렵고, 그 막연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역시 두려움을 부추긴다. 그래서 자학하고 헤맨다. 마침내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 두려움은 피할 수 없기에 이겨내야 한다. 그 싸움은 아프기에 성장통이라고 부르고, 이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나도 성장통을 호되게 겪고 있다. 고치를 벗어나야 나비가 되듯이, 껍질을 깨고 나와야 세상을 보는 병아리처럼 아픔을 간직한 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그 시절 자신을 그토록 짓누르던 고민들도 되돌아보면 그저 작은 점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던 물음들도 결국은 각자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뜻일까? 젊은 날의 기억은 그래서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것일까?
간절함 품고 오늘을 살아가기
황석영은 청춘의 아픔을 따스하게 보듬는다. 방황하는 준이를 통해 그 모든 것이 너에게 소중하게 남을 것이고, 그 아픔도 결국 그리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날의 준이들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성장통을 겪고, 그 아픔을 품어냈던 자신처럼 우리 세대들도 그것을 보듬으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준이가 베트남으로 간 것은, 그것을 이겨냈기에, 혹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슬픔과 죽음, 그리고 아픔이 공존하는 그 땅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보듬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전장은 자기 자신의 상처와 고독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곳이기에 그곳으로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준이는 자유를 꿈꾸고 긴 여행을 떠난다. 황량한 길로 자신을 내모는 것이다. 그 길은 그가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길의 시작이다. 거기서 그는 깨닫는다. 삶은 그 자체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걸. 숱한 방황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그 찬란함이 눈부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의 자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매 순간 순간의 생생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정말 축복일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법, 그것을 누가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말마따나 순간은 영원이 아니다.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순 없지만, 그 순간을 자신의 길을 걸으며 온전히 살아낼 수는 있다. 이 소설은 그래서 잊지 못할 문장으로 말한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싱싱하고 간절한 삶을 살아보라고. 나는 이 말이 우리 세대에게 보내는 황석영의 응원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