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지금’ 꾸는 꿈을 위한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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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9 22:20 조회 6,427회 댓글 0건본문
‘꿈’이라는 말은 현재형일까, 미래형일까? 조금 친절하게 물어보자. 꿈은 ‘꾸기 위해’ 있는 걸까, ‘이루기 위해’ 있는 걸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이루지 못하는 꿈이 의미가 있을까?
지금 꾸지 못한다면 그게 꿈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좀 더 고민하다보면, 사람들은 철학의 개념을 들먹이게 된다. 칸트나 스피노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근대니 탈근대니 하는 시대개념이 들썩이기도 한다. 이런 단순하지 않은 삶의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동화 속에 산뜻하게 버무려낸 작품이 나왔다. 작가의 프로필에 이전 작품의 제목이 없는 걸로 봐서는 이 책이 이 작가의 첫 책인가 보다. 첫 책으로 이 정도의 깊이와 감칠맛을 줄 수 있다니. 박수를 보낸다.
주인공 ‘진진’은 우리가 현실에서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엄마의 ‘특목고생 꿈’을 전혀 고민 없이 받아들인 아이다. 특목고를 가기 위한 준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아이였다. 그런 진진이 엄마의 소개로 ‘꿈꾸는 캠프’에 가게 된다. 엄마나 진진이나 이 캠프가 특목고를 위한 공부 방법 캠프려니 생각하고 선택했다.
이런 진진 앞에 꿈꾸는 캠프의 주인인 ‘이모’가 나타난다. 성이 ‘이’고 이름이 ‘모’라는 독특한 이름의 캠프 주인은 진진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고, 이 캠프에서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라고 해서 진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여기는 ‘지금’ 꿈을 꾸는 캠프였다. 그야말로 판타지다. 그런데 모범생 진진에게는 지금 당장 꿀 꿈이 없다. 그래서 일까, 진진은 자신이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줄 모르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진진은 우물 속 두레박과 인사를 나누면서 판타지에 들어서게 된다.
…(중략)… 진진이 손잡이를 잡는 순간, 두레박이 방긋이 웃었다.
“아깐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반가워, 난 퐁이야.”
“나는 진진이야.”
억지로 내뱉은 진진의 인사에 퐁은 볼이 발그레 물었었다.
“여자애랑 얘기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걸.”
“두레박이랑 얘기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_ 50쪽
이 장면은 이 책이 판타지라는 걸 진진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눈치 차리게 하는, 매우 매력적인 장면이다. 판타지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빨려들 듯이 그 세계를 인정하게 된다. 판타지의 첫 번째 생명은 ‘그럴듯함’이다. 작가는 이 몇 마디 대화로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두레박을 포함한 어떤 것이 말을 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럴듯함’으로 만들어버렸다.
판타지의 두 번째 생명은 ‘상상력’이다. 이 부분이 이 작가의 장점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다양하고 섬세하다. 말하는 두레박, 말하는 강아지쯤은 어쩌면 이 작가에게는 상상력 축에 들지 못한다. 만우절이라고 은행나무 이파리로 바꾸는 느티나무, 놀아달라고 조르느라 사람들 뺨을 간질이는 햇살들, 진심이 아니면 어떤 글자도 보여주지 않는 책들, 기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그림자, 분홍 눈사람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벚꽃 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귀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공부벌레.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상상력만으로도 이미 독자는 이 동화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근데 사람들은 웃기는 게 나랑 대화할 생각을 안 하고 내가 하는 얘기를 듣기만 해, 자기 생각은 얘기하지 않으려고 해’라고 책들이 말한다. 덩치라는 강아지의 꿈은 꼬리를 사분의 삼박자로 흔드는 것이다. 피아노를 치고 싶으면 손가락에게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이런 상상력은 정말 놀랍다.
판타지의 세 번째 생명은 ‘개연성’이다. 판타지가 그저 신기한 이야기일 뿐이라면 문학이라 말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꿈은 현재형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매우 당당히 펼쳐 보인다. ‘꿈꾸는 동안 즐겁지 않다면 그게 무슨 꿈이니?’라든가 ‘꿈은 깨지 않아, 새로운 꿈꾸기가 시작되지’라는 말을 작품 안에 무겁지 않게 툭툭 던져 놓았다. 이 말들은 작가 특유의 가벼운 이야기 전개 방식에 얹혀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판타지 속에서는 가볍던 그 말이 현실에 와서는 범상치 않은 무게를 가진다. 진진이 집으로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안녕, 나의 꿈, 나의 진진’ 하며 인사하는 장면에서 그 무게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판타지 속의 이야기는 현실의 독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면서 개연성을 갖는다. ‘지금까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 자신의 꿈에 예의를 다하기위해 이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까지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작품이다. 책 읽기가 참 행복한 작업이란 걸 누구에게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누구든지 꼭 읽기를 권한다.
지금 꾸지 못한다면 그게 꿈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좀 더 고민하다보면, 사람들은 철학의 개념을 들먹이게 된다. 칸트나 스피노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근대니 탈근대니 하는 시대개념이 들썩이기도 한다. 이런 단순하지 않은 삶의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동화 속에 산뜻하게 버무려낸 작품이 나왔다. 작가의 프로필에 이전 작품의 제목이 없는 걸로 봐서는 이 책이 이 작가의 첫 책인가 보다. 첫 책으로 이 정도의 깊이와 감칠맛을 줄 수 있다니. 박수를 보낸다.
주인공 ‘진진’은 우리가 현실에서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엄마의 ‘특목고생 꿈’을 전혀 고민 없이 받아들인 아이다. 특목고를 가기 위한 준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아이였다. 그런 진진이 엄마의 소개로 ‘꿈꾸는 캠프’에 가게 된다. 엄마나 진진이나 이 캠프가 특목고를 위한 공부 방법 캠프려니 생각하고 선택했다.
이런 진진 앞에 꿈꾸는 캠프의 주인인 ‘이모’가 나타난다. 성이 ‘이’고 이름이 ‘모’라는 독특한 이름의 캠프 주인은 진진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고, 이 캠프에서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라고 해서 진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여기는 ‘지금’ 꿈을 꾸는 캠프였다. 그야말로 판타지다. 그런데 모범생 진진에게는 지금 당장 꿀 꿈이 없다. 그래서 일까, 진진은 자신이 판타지의 세계에 들어온 줄 모르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진진은 우물 속 두레박과 인사를 나누면서 판타지에 들어서게 된다.
…(중략)… 진진이 손잡이를 잡는 순간, 두레박이 방긋이 웃었다.
“아깐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 반가워, 난 퐁이야.”
“나는 진진이야.”
억지로 내뱉은 진진의 인사에 퐁은 볼이 발그레 물었었다.
“여자애랑 얘기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걸.”
“두레박이랑 얘기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_ 50쪽
이 장면은 이 책이 판타지라는 걸 진진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눈치 차리게 하는, 매우 매력적인 장면이다. 판타지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빨려들 듯이 그 세계를 인정하게 된다. 판타지의 첫 번째 생명은 ‘그럴듯함’이다. 작가는 이 몇 마디 대화로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두레박을 포함한 어떤 것이 말을 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럴듯함’으로 만들어버렸다.
판타지의 두 번째 생명은 ‘상상력’이다. 이 부분이 이 작가의 장점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다양하고 섬세하다. 말하는 두레박, 말하는 강아지쯤은 어쩌면 이 작가에게는 상상력 축에 들지 못한다. 만우절이라고 은행나무 이파리로 바꾸는 느티나무, 놀아달라고 조르느라 사람들 뺨을 간질이는 햇살들, 진심이 아니면 어떤 글자도 보여주지 않는 책들, 기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그림자, 분홍 눈사람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벚꽃 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귀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공부벌레.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상상력만으로도 이미 독자는 이 동화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근데 사람들은 웃기는 게 나랑 대화할 생각을 안 하고 내가 하는 얘기를 듣기만 해, 자기 생각은 얘기하지 않으려고 해’라고 책들이 말한다. 덩치라는 강아지의 꿈은 꼬리를 사분의 삼박자로 흔드는 것이다. 피아노를 치고 싶으면 손가락에게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이런 상상력은 정말 놀랍다.
판타지의 세 번째 생명은 ‘개연성’이다. 판타지가 그저 신기한 이야기일 뿐이라면 문학이라 말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꿈은 현재형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매우 당당히 펼쳐 보인다. ‘꿈꾸는 동안 즐겁지 않다면 그게 무슨 꿈이니?’라든가 ‘꿈은 깨지 않아, 새로운 꿈꾸기가 시작되지’라는 말을 작품 안에 무겁지 않게 툭툭 던져 놓았다. 이 말들은 작가 특유의 가벼운 이야기 전개 방식에 얹혀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판타지 속에서는 가볍던 그 말이 현실에 와서는 범상치 않은 무게를 가진다. 진진이 집으로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안녕, 나의 꿈, 나의 진진’ 하며 인사하는 장면에서 그 무게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판타지 속의 이야기는 현실의 독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면서 개연성을 갖는다. ‘지금까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 자신의 꿈에 예의를 다하기위해 이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마지막 말까지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작품이다. 책 읽기가 참 행복한 작업이란 걸 누구에게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누구든지 꼭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