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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새책 평화와 공존의 문명을 만들어가기 위한 깊이 있는 상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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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6:37 조회 6,15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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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미국 한 단체(Pew Forum)의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무슬림의 인구 통계가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현재 무슬림인구는 15억 7천만 명에 달한다. ‘다문화사회’라고 주장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중동 및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오는 무슬림들의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와 다문화사회를 외쳐대는 것에 비하면, 전 세계 인구의 1/4이 귀의한 종교와 ‘순종하는 자(무슬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 수준은 너무나 낮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그 뿌리는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 같다. 서구가 만들어 낸 오리엔탈리즘의 프레임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당장 인터넷에 ‘무슬림’을 검색하면 그들에 대한 근거없는 모략과 마치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다수 기독교 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그러하듯,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신의 뜻에 순종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종교, 어느 나라에나 있는 소수의 과격파가 무슬림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세계화시대에 산다는 사람들의 관용과 이해는 없고, (종교적) 편협함과 무지몽매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종교와 세계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 이런 식의 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공포증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교육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계사 교과서에 진정한 ‘세계’는 없다. 세계사 교과서와 교육과정에서 말하는 ‘세계’란 서유럽과 중국이다. 교육과정에서는 세계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슬람의 역사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유럽과 중국의 정치사나 각종 제도는 상세히 다루면서, 이슬람 세계는 문화와, 문명 전달자의 지위만으로 접근한다. 교사들이 이슬람 세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해도 자료나 개설서가 유럽사나 중국사에 비하면 너무나 한정적이다. 그런데 가뭄 끝에 단비와 같은 책이 한 번에 두 권이나 번역・출간되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아랍인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이슬람의 태동부터 현대 중동세계에 이르는 방대한 시간과 지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제국의 형성과 분열이라는 복잡다단한 정치사와 자세한 종교사뿐만 아니라 문화, 언어에 이르는 부분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고찰한다. 농촌-

도시 문제(경제), 여성 문제, 분파(종파) 문제, 인종 등에 관한문제를 상세히 고찰하고 그것들과 중앙 권력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이러한 방대한 분량을 통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너무나 단순하게 알고 있어서 일원적 세계로 오인하기쉬운 이슬람 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슬람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 세계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인의 역사』에서도 단순히 중동 세계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유럽과 이슬람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신의 용광로』는 기존 역사책들과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중세 유럽과 동시대 이슬람 세계의 긴밀한 관계를 다룬다. 시간적으로 이슬람의 등장 배경과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축출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지역적으로 이슬람-유럽 전체를 다루긴 하지만 서유럽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다룬다.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과학과 인문학의 새로운 지식을 활발하게 수용했고, 그리하여 기독교 세계 국가들이 나중에 접촉하게 되는 르네상스의 지식 기반을 형성했다. … 무슬림 학문은 수십 년 동안 물밀 듯이 흘러넘쳐 안달루시아로부터 기독교 서방국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흡수하고 모방하는 모양새였으나 나중에는 컨베이어벨트나 다름없이 대량으로 전달되었다. _『신의 용광로』 551쪽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루이스는 당시 중세 서유럽 세계가 매우 야만적이며, 이베리아반도가 더욱 선진적이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서로마제국을 붕괴시킨 게르만족에 대해 ‘야만’이라는 표현이 너무 많이 등장하여 오히려 경도된 느낌이 들 정도다. 어쨌든 그의 이러한 분석은 서유럽의 근대 성공 신화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그 이전의 역사마저도 화려하게 보려 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또한 서유럽사에서조차도 소외된 이베리아반도에 관한 재인식이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다.

‘초기 유대교의 종교 및 법학 사상은 이슬람 사상의 체계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유대교가 신학과 철학 측면에서 이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와 같은 후라니의 이야기나,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기독교, 유대문명의 용광로(관용)였다’는 루이스의 생각은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지난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지금의 우리 세계보다 더 나은 관용의 시대가 있었으며, 평화와 공존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권 다 부록의 계보, 왕조, 용어 설명 등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칭찬하고 싶다. 그러나 『신의 용광로』는 번역에 있어서 몇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예언자의 이름을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쓰지 않는 ‘마호메트’라고 쓴 점, 신, 주님, 하느님을 뜻하는 ‘알라’를 ‘알라신’이라고 쓴 점 등이 그러하다. 직독직해한 듯 번잡한 영어식 문체가 읽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느낌도 든다. 두 권 모두 다 읽으려면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등장하는 이름이나 지명 등이 너무나 생소하고 외우기 어렵다. 그러나 세계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꼭 한 번은 공들여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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