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그의 손끝에서 열린 또 다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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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6 22:43 조회 6,240회 댓글 0건본문
내가 도저히 끊어버리고 돌아설 수 없는 것들, 끊어내고 싶지만 끊어낼 수 없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존재의 탯줄 _47쪽
지난 주말 이른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이 둘러앉았다. 화기애애할 자리지만 조용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선지 대화는 뚝뚝 끊겼고 어색함마저 감돌았다. 그 적막한 풍경을 다행히도 서너 살의 어린 조카들이 장난과 웃음으로 간간히 채워주웠다. 문득 조카의 귀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언니에게 던진 한마디, “귀는 영락없이 네 귀를 닮았구나.” 그렇게 사소한 것조차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는 가족의 그림자, 조용한 침묵 속에서도 드러나는 관계의 고리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곤 한다. 서로 간에 달아날 수 없고 끊어낼 수 없고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인연의 모습_113쪽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남한산성』에 대한 지난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체에 딱딱 끊기는 단문, 고립무원의 성에서 펼쳐지는 치욕스런 과거와 삶의 현장을 읽어내기가 버거워 결국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도 그와 같을까 두려웠지만 달리 읽히는 그의 필력에 연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 가족의 쓸쓸한 풍경이 겹쳐 가슴이 저렸지만 하나하나 주옥같은 글귀와 문장력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주인공 연주의 1인칭 시점으로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삶에 대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수목원 전속 세밀화가라는 그녀의 직업처럼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림에 담아내야 하는 힘든 과정을 작가는 글로써 재현해내고 있다. 산과 들을 사랑하고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다면 표현내기 힘든 글들이 여기저기서 퐁퐁 터져 나온다. 가까이 다가가자, 오므렸던 도라지 꽃잎이 꽈리가 터지듯이 터지면서 벌어졌다. 꽃잎이 벌어질 때 ‘퐁’ 소리가 났다. 내가 다가가는 발소리와 진동에 충격을 받아서 꽃송이가 터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봤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는 적막 속에서 도라지 꽃봉오리들은 퐁, 퐁, 퐁 열렸다. 열릴 때, 꽃잎에 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잎사귀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_196쪽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수감 중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수감 전의 비굴한 삶만큼이나 모범수로서 형기보다 일찍 출소하게 된다. 여고시절부터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 그, 그래서 출소 일에도 하루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고 도망
치듯 떠나버린 딸, ‘불효란 이런 것이로구나…… ,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라며 아린 가슴을 붙들고 떠난 그녀를 보며, 항상 서둘러 집을 나선 내 지난날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석방이라는 수감보다 무거운 형벌’을 견뎌내던 그는 병마의 고통 속에 남은 형기를 채우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화장되어 그의 딸이 일하던 수목원의 어느 산사에서 새의 밥이 되어 날아간다. 그녀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날이 저물어 오는 밤과 같았다면, 그의 죽음은 지난한 삶보다 평안해 보인다. 삶과 죽음, 생장과 소멸이 한 그루의 나무에 자연스레 얽혀 있듯이 그들의 죽음 또한 그녀가 수목원에서 보낸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수목원 생활도 정리하게 된 그녀는 자신과 서로 닮아 보여 아픈 직장 상사와의 인연의 고리도 끝내고 새 인연에 대한 희망을 내보이며 마무리 짓는다. 단 한 번의 우회전으로 텅 빈, 낯선 세상으로 들어섰던 그녀는 그렇게 단 한 번의 좌회전으로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간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작가의 기존 작품과 달리 뜻밖에도 스물아홉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 글보다 문장이 유려해 보인다. 혹자는 이런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특유의 문체가 변했다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숙한 나는 그러한 변화도 감지하지 못한 채, 책을 덮고 나서도 귓가에 쟁쟁쟁 울리는 그 글들의 향연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한 동안 내 머리 속에 뱅뱅 맴도는 차가운 풍경,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다시 치열한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그만 놓아두려 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힘에 겨웠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남루한 삶과 그 쓸쓸함이 겹쳐 힘겨웠다면, 책을 덮고 나서는 치열한 글쓰기에 작가의 노고가 절로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작가의 말처럼 그가 풍경 속에서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바라봤다면, 나 또한 눈이 아프도록 이 글을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 담아내지 못한 수많은 책 속 이야기들(할아버지와 좆내논 이야기, 상사 요한과 그의 아들 신우, 운명 같은 인연을 예고하는 김중위, 자살한 미술학원 여강사, 그리고 끊임없이 전화로 딸과 소통 불능의 독백을 내뿜던 어머니), 그들의 수런거림에 마음이 혼란스럽지만 이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말들을 작가는 어떻게 표현해냈는지, 그 치열한 말과 글들의 숲, ‘내 젊은 날의 숲’ 속으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
지난 주말 이른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오랜만에 가족이 둘러앉았다. 화기애애할 자리지만 조용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선지 대화는 뚝뚝 끊겼고 어색함마저 감돌았다. 그 적막한 풍경을 다행히도 서너 살의 어린 조카들이 장난과 웃음으로 간간히 채워주웠다. 문득 조카의 귀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언니에게 던진 한마디, “귀는 영락없이 네 귀를 닮았구나.” 그렇게 사소한 것조차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는 가족의 그림자, 조용한 침묵 속에서도 드러나는 관계의 고리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곤 한다. 서로 간에 달아날 수 없고 끊어낼 수 없고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인연의 모습_113쪽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남한산성』에 대한 지난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체에 딱딱 끊기는 단문, 고립무원의 성에서 펼쳐지는 치욕스런 과거와 삶의 현장을 읽어내기가 버거워 결국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도 그와 같을까 두려웠지만 달리 읽히는 그의 필력에 연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 가족의 쓸쓸한 풍경이 겹쳐 가슴이 저렸지만 하나하나 주옥같은 글귀와 문장력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주인공 연주의 1인칭 시점으로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삶에 대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수목원 전속 세밀화가라는 그녀의 직업처럼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림에 담아내야 하는 힘든 과정을 작가는 글로써 재현해내고 있다. 산과 들을 사랑하고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다면 표현내기 힘든 글들이 여기저기서 퐁퐁 터져 나온다. 가까이 다가가자, 오므렸던 도라지 꽃잎이 꽈리가 터지듯이 터지면서 벌어졌다. 꽃잎이 벌어질 때 ‘퐁’ 소리가 났다. 내가 다가가는 발소리와 진동에 충격을 받아서 꽃송이가 터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봤더니, 아무런 기척이 없는 적막 속에서 도라지 꽃봉오리들은 퐁, 퐁, 퐁 열렸다. 열릴 때, 꽃잎에 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잎사귀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_196쪽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수감 중이던 그녀의 아버지는 수감 전의 비굴한 삶만큼이나 모범수로서 형기보다 일찍 출소하게 된다. 여고시절부터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 그, 그래서 출소 일에도 하루 저녁을 함께하지 못하고 도망
치듯 떠나버린 딸, ‘불효란 이런 것이로구나…… ,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라며 아린 가슴을 붙들고 떠난 그녀를 보며, 항상 서둘러 집을 나선 내 지난날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석방이라는 수감보다 무거운 형벌’을 견뎌내던 그는 병마의 고통 속에 남은 형기를 채우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화장되어 그의 딸이 일하던 수목원의 어느 산사에서 새의 밥이 되어 날아간다. 그녀의 할아버지의 죽음이 날이 저물어 오는 밤과 같았다면, 그의 죽음은 지난한 삶보다 평안해 보인다. 삶과 죽음, 생장과 소멸이 한 그루의 나무에 자연스레 얽혀 있듯이 그들의 죽음 또한 그녀가 수목원에서 보낸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수목원 생활도 정리하게 된 그녀는 자신과 서로 닮아 보여 아픈 직장 상사와의 인연의 고리도 끝내고 새 인연에 대한 희망을 내보이며 마무리 짓는다. 단 한 번의 우회전으로 텅 빈, 낯선 세상으로 들어섰던 그녀는 그렇게 단 한 번의 좌회전으로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간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작가의 기존 작품과 달리 뜻밖에도 스물아홉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 글보다 문장이 유려해 보인다. 혹자는 이런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그의 특유의 문체가 변했다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숙한 나는 그러한 변화도 감지하지 못한 채, 책을 덮고 나서도 귓가에 쟁쟁쟁 울리는 그 글들의 향연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한 동안 내 머리 속에 뱅뱅 맴도는 차가운 풍경, 쓸쓸함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다시 치열한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그만 놓아두려 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힘에 겨웠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남루한 삶과 그 쓸쓸함이 겹쳐 힘겨웠다면, 책을 덮고 나서는 치열한 글쓰기에 작가의 노고가 절로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작가의 말처럼 그가 풍경 속에서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바라봤다면, 나 또한 눈이 아프도록 이 글을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 담아내지 못한 수많은 책 속 이야기들(할아버지와 좆내논 이야기, 상사 요한과 그의 아들 신우, 운명 같은 인연을 예고하는 김중위, 자살한 미술학원 여강사, 그리고 끊임없이 전화로 딸과 소통 불능의 독백을 내뿜던 어머니), 그들의 수런거림에 마음이 혼란스럽지만 이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말들을 작가는 어떻게 표현해냈는지, 그 치열한 말과 글들의 숲, ‘내 젊은 날의 숲’ 속으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