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시시(詩詩)한 책들] 용기라는 이름의 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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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02-21 17:22 조회 2,925회 댓글 0건본문
용기라는 이름의 필력
시시콜콜 안부를 물으며 생사를 확인하는 모임에서 늘 하는 놀이가 있다. 이른바 단어놀이인데, 그 자리에
서 생각나는 단어를 쓰고 채집함에 넣는다. 섞은 다음 한 개씩 꺼내 그 단어를 담은 문장을 한 줄씩 써서 잇
다 보면 공동이 쓴 한 편의 작은 시가 된다. 문단 내 성폭력, 연이은 미투운동이 벌어지면서 모임의 채집함
에도 다양한 단어가 모였다. 억압, 폭력, (숨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럼에도 ‘있어 줘’라는 말까지. 각자 고투하
며 살아가는 친구들의 생각과 고민이 같음을 체감한 날이었다. 페미니스트의 바이블로 통하는 『시스터 아
웃사이더』를 쓴 오드리 로드는 일찍이 “당신의 침묵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명언이
있기 전에도, 이후로도 침묵하지 않고 자기만의 필력으로 근육을 키워 온 언니들의 시집을 모았다. 근육의
이름은 다름 아닌 용기일 것이다. 최문희 편집장
『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송섬별 옮김|움직씨|2020
남성도 백인도 이성애자도 아니었던 로드의 삶은 여러 정체성으 로 나열된다. 사서, 암 생존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레즈비언. 이민 자 가정에서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자매 중 가장 까만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아웃사이더의 길을 내리 걸었다. 미시시피 인근 대학에서 시를 가르쳤고 공공도서관 사서 로 일했으며 게이인 에드워드 롤린스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 다. 44세 되던 해, 흔히 갖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항하듯 기존 범 아프리카주의 담론에 대항하여 아프리카 여성 신화를 주제로 이 시집을 냈다. 이름 하여 ‘블랙 페미니즘’ 이미지들. 피와 흙냄새가 진동하는 풍광 속에서 발설하고 분노할 줄 아는 언니들의 목소 리를 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로드는 가부장과 폭력이 난무 한 시대를 버틴 소녀들을 소환하여 우리를 시원하게 꾸짖는다. “이별 의식으로 달랠 수는 없을 거야/…한 아이가 겪은 품위 없 는 고통을 바라보는/어른들의 품위 있는 관점을”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앤 카슨 지음┃황유원 옮김┃난다┃2021
백인, 선진국 태생, 고대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대문학의 새 지 대를 개척 중. 이 이력만 들으면 시인이 ‘존버’는커녕 순항하며 산 듯 보여도 그는 고국에서 공격 받기 일쑤였다. ‘작가들의 최애’로 꼽히면 서도 시 혹은 산문, 논문을 엮어 만든 에세이 같기도 한(탈장르적인) 시인의 쓰기 방식을 허세라고 일축하는 남성작가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러든 말든 앤은 비평, 현대극과 고전극 사이를 오가며 자 신의 “근원을” 파헤쳤다. 브론테 자매를 오마주하거나 성서(「이사야 서」)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시집의 백미는 「소리의 성별」인데,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한다는 등의 고정관념을 탐구하는 지적이고도 시적인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건진 청정수 같 은 문장 한 토막.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다. 소리의 내면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는 궤적은 공적이다.”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에밀리 정민 윤 지음┃한유주 옮김┃열림원┃2020
한국인 이민자인 에밀리 정민 윤은 영어가 서툴렀던 시절, 자신을 구
원한 것이 시 쓰기였다고 고백한다. 타지에서 언어부터 행동양식까지
완벽하고자 했던 그는 시에서만큼은 자유로웠고 다큐, 소설, 신문기
사 속 단어를 발췌해 콜라주 방식의 시들을 고안했다. 그 시들이 시
집에 수록된 「증언」인데,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공부하고 같은 인
간으로서 고통에 통감해 시를 썼다. 황금주부터 김순덕에 이르기까
지 시인은 운동가였던 일곱 분의 이름을 시의 제목으로 배치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서두에 쓰인 시를 읽을 때마다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데, 산 역사라서 혹은 탁월한 연 사이 문장 배치와 시적 긴장감 때문
이었다는 건 말할 것도 없겠다. 번역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분노 이
후 ‘셀프케어’ 단계에서 나오는 시는 어떤 모양일지 고심 중이라고 했
다. 폭력이 동네일처럼 벌어지는 오늘 “나를 더 사랑하고자” 그려질
시인의 다음 문장을 응원한다. 언니들의 필력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