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청소년예술 깊게읽기>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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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7-08 01:18 조회 7,836회 댓글 0건본문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아버지 친구 분 댁에 가서 공만 왔다 갔다 하는 흑백 영상을 지루하게 보다가 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집에 TV가 없어서, 아버지께서 TV 있는 친구 분 댁에 뭔가 중요한 경기를 보러 가신 모양이었고, 그때 본 경기는 아마도 월드컵이 아니었나 싶다.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우리 집에도 TV가 생겨 저녁이면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곤 했는데 특히 레슬링 경기가 인기였다. 어린 마음에 안토니오 이노키와 김일의 레슬링 경기에서 김일이 지면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맘 졸이며 목청껏 김일을 응원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이 있던 1976년 양정모 선수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는 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가다 넘어져 다친 기억도 있다.
중학교 땐 고교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들을 흠모했다. 투타에서 활약한 김건우의 플레이에도 열광했지만 박노준 선수가 푹 눌러 쓴 모자 밑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와 날 선 콧대로 상대 타자를 제압하면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이 소녀 팬은 흥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로야구가 시작됐는데 삼미슈퍼스타즈의 팬이었던 친구의 꾐에 넘어가 여름방학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월담을 하여 친구 집에 가서 시원한 사이다를 먹으며 야구 중계를 본 일도 있다. 경기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짜릿한 일탈의 맛은 달콤하게 남아 있다.
‘기억을 공유하라! 스포츠 한국사’라는 책의 주문 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스포츠와 관련된 옛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렸다. 스포츠에 큰 관심도 없고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으며 스포츠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지만 기억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삶의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었고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들이었다.
30~40대 이상의 성인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지난날을 돌아보는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청소년에게 이 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194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스포츠 역사를 통시적으로 훑고 있지만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각 시대별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세 명의 필자가 번갈아 가며 에세이식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2002년 월드컵 한국과 이탈리아 경기에서 ‘Again 1966’이란 카드섹션이 관중석에 떴을 때 까마득한 그 옛날,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진출했었다는 사실을 삼척동자도 알게 됐고, 이 기막힌 역사가 다시 한번 재현되길 한마음으로 염원했다. 그만큼 스포츠의 역사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방직업이 산업의 주류를 이루었던 70년대, 대농(후에 미도파로 이름을 바꿈)은 무적의 여자배구팀으로 181연승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지만 방직업이 쇠퇴하고 기업이 도산하자 최하위 팀으로 밀려나고 팀마저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북한에 못 미치던 시절에는 축구 실력 역시 북한에 뒤졌지만 70년대 후반부터 우리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남북의 축구 실력 차 또한 벌어지게 되었다.
1980년, 우승 후보였던 광주일고 야구팀은 광주민주화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청룡기에 참석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5월 18일에는 광주에서 야구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
스포츠는 혼자 동떨어져 존재하는 분야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책을 읽으며 스포츠와 함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민심을 돌리기 위해 3S정책(스포츠, 섹스, 스크린)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서울올림픽이 유치되었다는 사실이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축구, 야구 등의 승부 조작에 이르기까지 스포츠 이면의 불편한 진실 역시 이 책은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는 사이 우리도 모르게 정치적 의도나 조작에 휘둘리지 않도록 각성하게 한다.
스포츠는 열정이고 드라마인 줄로만 알았는데 추억과 향수이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읽는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 삶과 기억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스포츠를 더 재미있고 올바르게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