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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새책 [어린이 그림책 깊게 읽기]삶의 한복판을 건드리는 ‘문제적’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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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2-10 21:05 조회 7,05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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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마거릿 와일드 지음|론 브룩스 그림|강도은 옮김
파랑새|50쪽|2012.07.25|12,000원|모든학년
호주|욕망, 소외, 질투, 분노

삶의 어두운 단면을 매우 불편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그려낸 ‘문제적 그림책’이 나왔다. 『여우』는 단일한 주제를 명쾌하게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맥락의 의미층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만만치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건져 올리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곧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철학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지금 여기 삶의 한복판을 건드리는 그림책 『여우』의 세계로 출발해 보자.

우선 『여우』는 날고 싶다는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채 여우의 꾐에 빠져 개를 배신하고 결국은 혼자가 되는 까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우』는 까치를 돕고, 여우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결국은 둘 다에게 버림받는 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여우』는 개와 까치의 관계를 질투해 둘의 관계를 갈라놓고, 다시 스스로 혼자가 되는 여우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여우』는 한쪽 날개를 다쳐 날 수 없는 까치,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개,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의 냄새를 풍기는 여우, 즉 육체적·정신적 불구의 존재들이 자발적 혹은 타의로 관계의 생성에 실패하고 혼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파국의 스토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여우』는 그리 간단히 요약할 수 없다는 데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까치는 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욕망의 노예이자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한쪽 날개가 불에 타버린 후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붉은색의 여우를 경계하고, 이를 알지 못한 여우에게 오해받은 후 버림받는 가련한 영혼이라 할 수 있을까. 붉은 사막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까치는 과연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일까. 아니면 친구가 있는 곳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구원받은 영혼이라 할 수 있을까.

개는 어떠한가. 약자인 까치를 배려하고 타자인 여우의 존재를 인정한 성숙한 존재일까. “여우는 좋은 아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여우를 인정한 것은 혹시 포즈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까치를 등에 태워 달리고, 까치와 다정하게 대화했던 것과 달리 개와 여우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난 너를 인정해. 하지만 내게 가까이 오지는 마!’의 태도는 명백한 위선이다.

여우를 사악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불행하고 가련한 존재는 여우이다. 불길처럼 보이는 진한 붉은 털은 자신의 의지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낙인의 조건이 되고 말았다. “여우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애야.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조심해.” 눈에 보이는 까치의 다친 날개는 보살핌의 대상이 되지만, 보이지 않는 여우의 분노와 질투와 외로움은 위로와 배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여우의 마음은 왜 이토록 황폐해졌을까.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도 체념한 듯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위로받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어버린 여우는 자신의 분노를 고스란히 되갚아 준다. “이제 너와 개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그 복수는 승리의 외피를 두른 처절한 절망에 가깝다.

이러한 질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여우』는 매끄러운 독해를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머뭇거리며 꾹꾹 눌러 쓴 듯한 글씨체, 글 텍스트의 산만한 배치, 붉은 톤의 거칠고 삭막한 그림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느린 독해를 요구한다. 존재의 심연과 참된 세계와의 조우는 느린 독해 속의 사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파국적 내용과 불편한 형식의 통일된 체계가 『여우』를 미학적으로 더 높은 곳으로 견인한다.

『여우』가 ‘문제적’인 또 다른 이유는 이러한 파국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부분이 아닌 전면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우』가 이를 적나라하고 적확하게 드러내는 텍스트이자 소통의 매개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우』는 가짜 욕망과 진짜 욕망, 소외와 외로움, 타자와 윤리 등을 연령을 비롯한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할 수 있는 최고의 텍스트이다. 『여우』가 까치와 개와 여우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여우』인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최고의 질문은 혹시 이것이 아닐까. “여우의 분노와 질투, 외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만약 한국적 현실에서 답을 찾는다면 승자독식의 무한경쟁과 약자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등이 아닐까 한다.

당연하겠지만 내가 공범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 여우와 같이 아픈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도 결코 행복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운 진실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아픈 각성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심조심, 비틀비틀, 폴짝폴짝. 까치는 친구가 있는 곳을 향해 멀고 먼 여행을 시작했어.”처럼 우리도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의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자. 서로의 눈이 되고 날개가 되어 하나의 모습으로 호수에 비친 개와 까치의 모습으로 떠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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