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오늘의 청소년책 북토크] 무심한 호의와 제대로 하지 못한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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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3-08 11:49 조회 1,497회 댓글 0건본문
무심한 호의와
제대로 하지 못한 애도
고정원, 김윤나, 최지희 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 사서
몇 주 전, 독서동아리 중학생들과 다른 도서관 독서동아리 청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합정역에 갔습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서 내리기 위해 문 앞을 메웠습니다. 순간 아이들과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사람이 많이 움직이는 곳을 피하자는 의견을 나누었고 우리는 역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이태원 사고가 생각보다 큰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죽음과 그 죽음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책이 소설 『유원』이었습니다.
『유원』으로 들여다본 상실 이후의 삶
김윤나 이야기 나누기로 한 주제가 ‘상실, 애도’입니다. 상실을 겪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청소년소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우린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지 생각을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정원 도서관에서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초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매일 매일 안 되는 것, 못하는 것 투성이라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청소년들은 또래집단, 학교, 가족, 사회에서 크고 작은 상실을 이미 겪고 있어요.
김윤나 이 책을 이번 대화를 위해 다시 읽었어요. 『유원』은 화재사건에서 살아남은 열여덟 살 주인공 유원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에요. 동생을 살리고자 어린 유원을 물에 적신 이불에 말아 창밖으로 던진 언니는 세상을 떠나고,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 내느라 이웃 아저씨는 몸을 크게 다쳐요. 이로 인해 유원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갖고 성장해요. 작가의 말을 보면, 가장 먼저 아저씨라는 인물을 구체화했다고 한 부분이 의외였어요. 아저씨가 없었다면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가 소설에서 입체적인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지희 저는 수현이(주인공 유원의 친구)가 더 입체적으로 보였어요. 작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수현이를 통해 보여 준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밉상(?)으로만 보이지 않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정원 그쵸, 유원이 살아남은 죄책감 같은 것을 수현을 통해 내려놓고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었죠.
김윤나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감정 중에서 자책감이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생각했어요. 이 책을 읽으며 『안녕을 말할 땐 천천히』가 생각났어요. 이 책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공감하며 죄책감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 줘요. 영화 <파이브 피트>를 보면 아픈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외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런 청소년 모임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해
요. 『유원』의 대사처럼 “괜찮아져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당사자들이어야 해요.
최지희 맞아요. 비슷한 아픔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더 상처가 되는 것 같아요. 심리학에서 애도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주인공 유원은 사회적인 사건을 겪었기에 12년이 지나도록 커뮤니티에 회자된다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고정원 이런 부담스러운 관심은 깊이 있는 배려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무심한 호의에 가깝기에 당사자에게는 더 큰 상처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외면하지 않을 권리와 잊힐 권리
최지희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 안에서의 공감과 대화가 우선이에요. 가족 안에서 상실로 인해 서로 아프니 피하고 단절되고 고립되며 상처가 더 커지죠.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인데··· 전 이런 의미에서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이 가족끼리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잘 그렸다고 생각해요. 엄마와 딸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묻어두고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어요. 읽으면서 정말 많이 울기는 했지만, 외면하지 않음이야말로 ‘애도의 시작’이었어요.
고정원 청소년기에는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하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애도하는 과정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아요. 게다가 사회적 사고가 점점 늘어나는 최근에는 특히 그렇죠. 최근 이태원 사고 후에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학교 매점에 아이들이 몰릴 때,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을 때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포가 밀려온다고 하더라고요. 과거에는 사고 뉴스를 보면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대요.
김윤나 세월호 사고나 이태원 사고와 같은 사회적 사고에서 어른들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올바른 애도를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죠.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막연한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최지희 맞아요. 『유원』에서도 12년이나 지났는데 방송국 PD가 찾아오고, 아저씨는 자기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인터뷰를 종용하고, 유원이 겪은 사건을 그저 가십거리 정도로 여겨요. 유원을 두 번 힘들게 하는 거잖아요. 유원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도, “저 잘 살고 있어요, 괜찮아요.”라고 말하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가 너무 끈질기게 이야기했어요. 엄마 아빠의 죄책감 때문에 아저씨에게 밥도 주고, 돈도 빌려 주고, 인터뷰도 하라고 설득한 거잖아요. 유원에게도 ‘잊힐 권리’가 필요해요.
고정원 제가 엄마라서 그런지 유원의 엄마, 아빠한테 화가 났어요. 저 같으면 딸에게 아저씨가 못 나타나게 했을 것 같아요. 밖에서 만나고, 집으로 오면 더 이상 돈이고 뭐고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며 말이죠. 부모가 딸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지희 수현이가 오히려 유원을 지켰어요. “우리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 준 부분에서 제가 다 후련하더라고요.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아저씨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읽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수현이가 유원에게 이런 말로 죄책감을 없애 주었을 때 더 좋았어요.
김윤나 이야기 나누다 보니 영화 <벌새>도 생각나네요. 사회적 사건에서 비롯된 죽음도 나오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통해 주인공이 겪은 상실 그리고 성장을 보여 주는 영화이니까요. 주인공이 유독 마음을 열었던 교사가 등장하는데, 성수대교 사고에서 희생돼요. 이 영화는 그 후 주인공이 상실을 겪고 찬찬히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내요.
고정원 치유 다큐멘터리 <친구들: 숨어있는 슬픔>도 비슷한 선상에 놓인 작품이에요. 세월호 사고로 친구를 잃은 청소년들 이야기인데요. 정혜신 의사가 희생자의 친구들을 만나고 상담하는 과정을 그려 냈는데, 아이들은 주변에서 “이제 그만해라, 그만 슬퍼해도 된다.”라고 하는 말들이 너무 큰 상처로 다가온다고 하더라고요.
무기력을 넘는 마음에 관하여
최지희 맞아요. 섣부른 위로가 더 힘들어요. 언제까지 슬퍼해도 되는지를 왜 다른 사람이 정해야 할까요?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애완동물의 죽음인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청소년들이 정말 많이 보는 만화로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와 『뽀짜툰』이 있는데 이런 상실과 애도 과정을 잘 그려 놓았어요.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라서 그리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록하는 시간들이 치유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아요.
김윤나 이런 만화가 큰 상실을 경험한 청소년들에게 추천하기에 좋아요. 실제로 가족의 죽음이나 친구의 죽음을 통해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같은 내용을 다루면서 아픔을 이야기하는 책을 추천해 줄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떠나간 반려동물 이야기로 애도를 시작하는 방법을 알아가도 좋을 것 같아요.
고정원 전 이미 일어난 일을 문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작품을 읽게 해 주고 싶기도 해요.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사회적 아픔을 판타지 공간으로 옮겨 놓고 역사 바꾸기를 시도하는데, 과거가 바뀌니 현재도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고통받고 상처받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 과거를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SF가 많이 나오고 그 이야기들이 많은 공감을 받고 있어요. 코로나19와 각종 사고로 무기력해진 우리에게 문학이 할 수 있는 장르적 역할을 해주는 새로운 통로가 아닐까 싶어요.
최지희 세월호 사건 이후로 청소년들이 더이상 어른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죠. 이제 청소년들은 자기 목숨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학교에서는 교실에 있으라고 했지만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뛰어나왔대요. 운동장으로 나오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학생들은 알고 있었고 판단도 스스로 했어요.
고정원 청소년들은 이제 압사 사고에 대한 대처방안도 알고, 안전 문제에 관해서도 스스로 찾아서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기력’이에요. 청소년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차피 안될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김윤나 무수한 사회적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한지가 확인하곤 했으니까요. 무력감도 많이 느끼게 되었고요.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최지희 이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연대의 힘’을 보아야 해요. 치유 모임도 확대해야하고요. 사실 상실감보다 무기력을 극복하기가 더 힘들어요. 상실감은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무기력은 시간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정원 무기력 역시 연대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어요. 경험해 봐야 해요. 연대의 힘으로 성공해 본 경험이 있다면 다른 희망을 그릴 수 있어요. 책을 통해 공감의 경험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어요. 『유원』은 이런 의미에서 충분히 독자들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책이니까요. 다음에는 청소년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을 듯해요. 『유원』을 쓴 백온유 작가의 다음 책은 『페퍼민트』인데,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이야기예요.
김윤나 가족의 구성원에서 엄마나 아빠의 부재를 겪은 청소년들은 자신 스스로 가장이 되거나 어른이 되어야 하잖아요. 『유원』은 언니의 죽음에 대해 다루지만, 오늘 이야기한 상실의 주제와 더불어 다음에 나눠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인 거죠.
고정원 같이 이야기 나눠 보면 청소년들이 가족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요. 생계를 책임지는 청소년도 있어요.
최지희 청소년들이 애도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 좋은 책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고정원 도서관부터 청소년들을 위한 안전한 연대의 공간이 되기 위해 같이 노력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