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풀빵 혹은 타꼬야끼 굽는 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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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30 20:07 조회 6,175회 댓글 0건본문
강애라 서울 대치중 국어교사
빵을 좋아하는 나는 빵의 정수(?)인 붕어빵을 당연히 좋아한다. 좋아하다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본인에게는 애정이지만 남들 눈에는 까다롭게 구는 것 같은 조건이 많아진다. 내 나름의 맛있는 붕어빵은 우선 뜨거워야 한다. 바로 구운 것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미리 많이 구워 놓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붕어의 배 부분에 팥이 비칠 정도로 겉피가 얇아야 하고 꼬리 부분은 약간 탈 정도로 바싹 구워져야 한다. 구어 있는 붕어빵 색깔로도 피의 두께를 알 수 있다. 마치 이 책의 앞부분처럼 나의 붕어빵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런 내 나름의 기준이 이 책 주인공의 맛있는 붕어빵 기준과 많은 부분 일치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주인공인 내가 이야기를 한다. 서술자는 이야기꾼이다. 대화체가 재미있고 나머지 이야기체도 찰지다. 서술자인 나는 이야기꾼처럼 이야기를 풀다가 어색하지 않게 대화체로 이어진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냥 그들의 일상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것 같다. 책 앞머리에 나오는 장황한 붕어빵 이야기가 다소 어리둥절해도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서술자 ‘나’는 붕어빵 굽는 일을 무슨 의식 치르듯 하는 아버지 덕에 일찍 직업에 대한 걱정 없이, 가업을 잇고자 노력만 하면 되는 행운아다. 아니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지만 최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이야기 했더라 “위대한 일은 사소한 일의 반복에서 나온다고……” 좋아해서 연구하고 반복하다 보면 많이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견해가 생기고 그 견해가 대를 이어 내려오면 가문의 철학이 된다. 고수는 옆에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겸허하게 한다. 아버지는 고수였고 고수를 알아보는 사람들 덕에 여름에도 붕어빵을 구울 정도 되니 먹고 사는 것에는 자유로웠다. 이것을 보고 자란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붕어빵을 잘 굽기 위해 공부했고 담임과 아이들이 이해를 못했지만 평생 직업으로 붕어빵 굽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한다. ‘나’는 군대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붕어빵을 구워야 했고 다시는 붕어빵을 굽지 않으리라 선언한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업을 잇는 일에
서 또 다른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나’가 타꼬야끼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그의 스승 밑에서 손놀림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는 대목쯤 오면 이 이야기가 단지 풀빵을 굽는 이야기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아니 풀빵의 진가를 생각해야 한다. 타꼬야끼는 이천 원에 네 알이지만 그 네 알의 맛이 다 차이가 나야 한다. 숙련을 넘어 창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남들이 다 가고자 한 대학을 나왔지만 몇 년째 임용고시에 떨어지는 현지는 숙련의 과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임용고시생 현지는 숙련의 과정을 넘어 창조를 하는 서술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수련생이 된다. 이들의 통통 튀는 러브라인도 상쾌하다. 그런가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취직시험에 찌들어 살다 어이없게 교통사고를 당한 철규는 이 소설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 가장 닮아 있다.
서술자의 아버지가 붕어빵의 원조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타꼬야끼 스승이 그런 아버지와 풀빵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하다. 진지한 것을 경쾌하게, 무거운 현실을 가볍지만 날림이 아니게 표현하는 작가의 글 솜씨가 너무 돋보인다. 만나지 못해 봤지만 프로필 사진 속 작가는 아주 귀여운 사람일 것 같다.
2013년 학교는 온통 진로교육으로 들썩인다. 선진국의 사례를 접목해 중학교 진로교육을 강화한다고 난리법석이다. 경력 많은 교사를 연수를 시켜 진로 부장으로 각 학교에 배치하여 창업캠프를 열고 진로 체험을 하라고 성화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죽은 교육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구조를 무시한 채 선진국 제도를 도입해 단시일에 효과를 내려는 조급증은 더 문제이다. 서유럽, 북유럽처럼 배관공 월급과 교수 월급이 차이가 없어야 두 직업을 동등하게 놓고 내 능력과 적성을 찾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모르지 않으면서 늘 정책은 요란하고 탁상공론이다. 차라리 이 책을 한 권 읽히고 토론하게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바른 직업관에 도움이 될 듯하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빵의 정수(?)인 붕어빵을 당연히 좋아한다. 좋아하다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본인에게는 애정이지만 남들 눈에는 까다롭게 구는 것 같은 조건이 많아진다. 내 나름의 맛있는 붕어빵은 우선 뜨거워야 한다. 바로 구운 것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미리 많이 구워 놓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붕어의 배 부분에 팥이 비칠 정도로 겉피가 얇아야 하고 꼬리 부분은 약간 탈 정도로 바싹 구워져야 한다. 구어 있는 붕어빵 색깔로도 피의 두께를 알 수 있다. 마치 이 책의 앞부분처럼 나의 붕어빵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런 내 나름의 기준이 이 책 주인공의 맛있는 붕어빵 기준과 많은 부분 일치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주인공인 내가 이야기를 한다. 서술자는 이야기꾼이다. 대화체가 재미있고 나머지 이야기체도 찰지다. 서술자인 나는 이야기꾼처럼 이야기를 풀다가 어색하지 않게 대화체로 이어진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냥 그들의 일상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것 같다. 책 앞머리에 나오는 장황한 붕어빵 이야기가 다소 어리둥절해도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서술자 ‘나’는 붕어빵 굽는 일을 무슨 의식 치르듯 하는 아버지 덕에 일찍 직업에 대한 걱정 없이, 가업을 잇고자 노력만 하면 되는 행운아다. 아니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지만 최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이야기 했더라 “위대한 일은 사소한 일의 반복에서 나온다고……” 좋아해서 연구하고 반복하다 보면 많이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견해가 생기고 그 견해가 대를 이어 내려오면 가문의 철학이 된다. 고수는 옆에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겸허하게 한다. 아버지는 고수였고 고수를 알아보는 사람들 덕에 여름에도 붕어빵을 구울 정도 되니 먹고 사는 것에는 자유로웠다. 이것을 보고 자란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붕어빵을 잘 굽기 위해 공부했고 담임과 아이들이 이해를 못했지만 평생 직업으로 붕어빵 굽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한다. ‘나’는 군대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살아남기 위해 붕어빵을 구워야 했고 다시는 붕어빵을 굽지 않으리라 선언한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업을 잇는 일에
서 또 다른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나’가 타꼬야끼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머물고 그의 스승 밑에서 손놀림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는 대목쯤 오면 이 이야기가 단지 풀빵을 굽는 이야기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아니 풀빵의 진가를 생각해야 한다. 타꼬야끼는 이천 원에 네 알이지만 그 네 알의 맛이 다 차이가 나야 한다. 숙련을 넘어 창조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남들이 다 가고자 한 대학을 나왔지만 몇 년째 임용고시에 떨어지는 현지는 숙련의 과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임용고시생 현지는 숙련의 과정을 넘어 창조를 하는 서술자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수련생이 된다. 이들의 통통 튀는 러브라인도 상쾌하다. 그런가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취직시험에 찌들어 살다 어이없게 교통사고를 당한 철규는 이 소설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과 가장 닮아 있다.
서술자의 아버지가 붕어빵의 원조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타꼬야끼 스승이 그런 아버지와 풀빵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하다. 진지한 것을 경쾌하게, 무거운 현실을 가볍지만 날림이 아니게 표현하는 작가의 글 솜씨가 너무 돋보인다. 만나지 못해 봤지만 프로필 사진 속 작가는 아주 귀여운 사람일 것 같다.
2013년 학교는 온통 진로교육으로 들썩인다. 선진국의 사례를 접목해 중학교 진로교육을 강화한다고 난리법석이다. 경력 많은 교사를 연수를 시켜 진로 부장으로 각 학교에 배치하여 창업캠프를 열고 진로 체험을 하라고 성화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죽은 교육도 문제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구조를 무시한 채 선진국 제도를 도입해 단시일에 효과를 내려는 조급증은 더 문제이다. 서유럽, 북유럽처럼 배관공 월급과 교수 월급이 차이가 없어야 두 직업을 동등하게 놓고 내 능력과 적성을 찾아갈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모르지 않으면서 늘 정책은 요란하고 탁상공론이다. 차라리 이 책을 한 권 읽히고 토론하게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바른 직업관에 도움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