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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새책 마술적인 시간편집으로 만나는 근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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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4-16 22:06 조회 6,13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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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윤 인천 경인여고 국어교사
 
 

성경을 차분히 읽으려 할 때마다 번번이 미끄러져 반복해서 읽는 구절들이 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와 있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보다는 조금 더 긴 문장을 읽긴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게다가 본문보다 긴 주석은 우리를 질리게 하는데,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통해 그러한 경험을 맛보았다. 오늘 소개할 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얼마든지 화려한 주석을 매달고 등장할 수 있는 많은 인물들이 최소한의 주석에서마저 본문 속에 파묻히고, 마술적인 시간 편집으로 근대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미술사와 근대사를 전공한 독일 태생의 저자 플로리안 일리스는 이 책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유럽을 중심으로 시대와 문화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보여준 사적이고도 공적인 사건을 재현한다. 공시적 역사 서술 창안자인 베르너 슈타인이 『문화시간표』에 썼던 시도처럼 친숙하거나 혹은 전혀 낯선 예술가들의 움직임을 횡적으로 분류하려는 예술문화서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에는 모든 나라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또다시 전쟁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고 확신한 영국의 경제학자 노먼의 1910년 작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거대한 환상』이다. 모든 고등생물은 서로에게 우호적이라며 미래에는 국가들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했던 빌헬름 뵐셰의 주장은 『생명의 승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이미 진행 중이던 발칸전쟁과 1914년부터 4년간 이어질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의 운명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1913년은 그 자체만으로 전쟁과는 무관한 세기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트랙을 벗어난 백여 마리의 말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독자는 1세기 전 유럽의 한복판에 놓여진다. 각 분야에서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긴 300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그려내는 보폭은 생각보다 사소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에게 청혼하기까지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지만, 사연을 통해 만나게 되는 그의 초상은 두서없이 불안하며 신경과민 증세가 가득하다. 토마스 만은 비평가의 혹평에 치를 떨며, 오스카 코코슈카는 알마 말러에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벗어나지 못한다. 낯설든 익숙하든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역사책보다 생생하며 인간적인 약점으로 가득하다.
 

현기증이 나는 인물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잘 짜인 소설보다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게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진 <모나리자>는 고장 난 알람시계처럼 곳곳에서 단서가 없다는 것만을 들려주다가 336쪽에 이르러서야 베일이 벗겨진다. 침묵서약으로 시작된 프로이트와 융과의 절교는 9월의 뮌헨에서 열린 학술대회까지 결투를 유예하며 읽는 이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64년 동안 왕좌에 앉아 있는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군림하는 쇤브룬 궁전을 빠져 나가고, 바로 근처 빈의 비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스탈린이 아카데미의 입학을 거절당하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가 쇤브룬 궁전 공원의 산책길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거라는 개연성 있는 추측과 상상력은 기묘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복잡해 보이는 이 책의 구조를 단순화시키는 실용적인 방법은 공간을 파악하는 일이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뉴욕의 총성과 루이 암스트롱이지만 저자 스스로 1913년 모더니즘의 전방 도시 사인방이라 일컫는 베를린, 파리, 뮌헨, 빈이 주요 무대다. 다양한 미술가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표현주의 예술가들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된다. 표현주의는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예술을 주관적 현실의 확장으로서 창조하려 했던 경향이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다리파의 중심인물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등장이, 12월엔 뒤샹의 <자전거 바퀴>로 마무리되는 사진의 배치를 음미할 수 있다. 친절하지 않지만 결코 질리지 않게 매혹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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