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칼데콧상 수상작들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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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5-03 13:45 조회 653회 댓글 0건본문
칼데콧상 수상작들을 돌아보며
신수진 번역가
4월부터 제주시 어린이도서관 ‘별이내리는숲’에서 그림책 강의를 시작했다. 역대 칼데콧상 수상작들을 10년 단위로 살펴보면서 그중 중요한 의미를 지니거나 문제적 요소가 있는 책들 서너 권을 한국어로도, 원서로도 읽어 보는 수업이다. 마음이 잘 통하는 사서선생님이 지난 가을에 ‘그림책으로 커지는 세계’라는 강의 제목을 제안해 주셨는데, 평소 해 보고 싶었던 강의 계획과 잘 맞아떨어져 기쁜 마음으로 강의안을 보내드렸다. 독자들이 한국어 번역본만으로는 온전히 감상하기 힘들었던 책 속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끔 돕는 목적이 가장 컸지만, 이번 계기로 미국 역사에 비추어 ‘칼데콧상’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도 싶었다.
칼데콧상이 가진 한계
칼데콧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도서관협회의 어린이 도서 분과에서 주관 하는 상이다. 1938년부터 해마다 미국에서 발행된 어린이 그림책 가운데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서 수상작(winner) 1종과 명예상(honor) 4종 내외를 시상하는데, 미국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인 작가가 그 대상이다.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제한을 두지 않는 ‘전 지구적’ 상이 아닌, 명백히 ‘미국’을 경계로 두는 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9년에 영화 <기생충>이 미국에서 개봉하던 당시 봉준호 감독이 한 매체와 인터뷰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한국 영화는 왜 지난 20년 동안 한 작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했을까.”란 질문을 받은 봉준호 감독은 “오스카는 로컬(local)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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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을 가진 권위 있는 상이 분명하지만 칼데콧상도 결국은 ‘로컬’이다. 그러니 칼데콧상을 가리켜 ‘그림책의 노벨상’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정정해 주자(게다가 노벨상과 달리 상금도 한 푼 없다).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칼데콧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책의 역사를 일군 19세기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랜돌프 칼데콧(Randolph Caldecott, 1846∼1886)은 안타깝게도 병약한 사람이었다. 따뜻한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요양하던 칼데콧은 마흔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1938년, 거장 칼데콧의 이름을 딴 그림책 상을 미국에서 먼저 제정하고 난 뒤, 영국에서는 1955년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케이트 그린어웨이(Kate Greenaway, 1846∼1901)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었다.
오래전 그림책들이 주는 뜻밖의 감흥
어린이책에는 당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적 가치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칼데콧상 수상작들을 살펴보면서, 9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국 사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1938년 첫 번째 수상작 『Animals of the Bible』은 성경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동물들에 관한 31가지 이야기다. 성경에서 소재를 가져왔다는 점은 물론이고, 책 속 인물들 모두 피부가 희고 팔다리가 길쭉한 서양인이라는 점, 사자나 곰 같은 맹수들조차 인간에게 복종하는 온순한 모습으로 재현돼 있다는 점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책 하나만 가지고 ‘칼데콧상도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1939년 수상작인 『Mei Li』는 중국 베이징에서 6년간 살았던 경험이 있는 작가 토머스 핸드포스가 당시 만났던 소녀 ‘메이 리’를 주인공으로 중국의 새해맞이 풍습을 석판화로 그린 책이다. 섣불리 오리엔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책이라 의미가 깊다. 1939년 명예상 수상작인 제임스 도허티의 『앤디와 사자』는 이솝 우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재미난 이야기다. 거칠고 재빠른 선으로 그린 2색 석판화인데, 초창기 미국 이민자 가족의 생활상이 꼼꼼히 잘 드러나 있는 점이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다. 귀퉁이가 깨진 거울이 붙은 현관, 책가방도 없이 노끈에 책 몇 권 묶어 들고 맨발로 학교 가는 주인공, 학교까지 졸졸 따라다니며 주인공과 함께 모험하는 말라깽이 강아지 등.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어린이들과 함께 미래를 꿈꾸었을 당시의 작가들을 생각해 본다. 인쇄 기술의 한계 때문에 한정된 색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어린이들을 사로잡을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화면 연출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도 돌아보게 된다. 눈을 반짝이는 그림책 독자들과 함께 천천히 영어 텍스트들을 읽어 나가면서 그림책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