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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영화 읽기 책 그리기] 망국의 슬픈 운명을 살다간 공주, 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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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7-06-05 14:38 조회 4,05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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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권비영 작가의 『덕혜옹주』가 출간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핏줄이자 망국의 슬픈 역사를 증명하는 인물인 덕혜옹주에 관해 그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의 출간은 실로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종이 61세에 얻은 딸이니 그 사랑을 짐작할 만도 합니다. 고종은 소위 말하는 ‘딸바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궁안에 ‘준명당’이라는 유치원을 설치하고 15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꼭 가마에 태워 보냈다고 합니다. 행여 덕혜옹주가 넘어져 다칠까 마루에 난간을 설치하라고 이르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던 덕혜옹주는 1919년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습니다.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신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새도 없이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으로 가는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고국과의 긴 이별의 시작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일본으로 간 덕혜옹주는 그 후로 38년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망국의 공주로 고단한 인생길을 걷게 됩니다.
 
 
조선왕조의 무력함
 일본으로 간 것은 비단 덕혜옹주만이 아니었습니다. 덕혜옹주의 오빠인 영친왕 또한 오래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정략결혼에의해 영친왕은 마사코(우리나라 이름 ‘이방자’ 여사)라는 일본 여인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부친을 잃은 덕혜옹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슬피 보내던 덕혜옹주는 유학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일본 대마도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일본 정부와 조선의 친일파 고관대작들에 의해 진행되죠.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덕혜옹주는 끊임없이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일본의 감시와 반대로 인해 돌아가지 못합니다. 결혼 또한 고종이 정해 놓은 혼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일제의 뜻대로 감행하게 됩니다. 덕혜옹주가 일본인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저항해 보지만 순종이나 영친왕은 강하게 반대하지 못하고 이를 수락합니다.
 영화에서 영친왕이 독립투사들이 준비해 놓은 루트를 따라 상해로 망명하려다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친왕은 아내와 덕혜옹주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며 망명을 포기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당시 조선왕조의 무력함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왕실의 고위직들은 전부 친일파 대관들이 차지하고 있고, 일본으로부터 왕실과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신하는 소리 없이 추방당합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 사람들도 결국 만국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저지당해 국제사회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나마 이것도 고종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이죠. 고종이 승하하고 왕위를 이은 순종은 사실 있으나마나 한 왕의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영친왕과 이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책과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무력함에 슬프기도 하고, 그 무력함에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덕혜옹주 또한 일국의 공주임에도 일본에 갇혀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탈출과 밀항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소설에서는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절망하는 비극적인 인물로만 그려집니다.
 그래도 고종이 승하했을 때나, 덕혜옹주가 시집갈 때 언론사들이 결혼사 진에서 일본인 신랑의 얼굴을 지워버린 것을 보면 여전히 왕실에 대한 굳건한 로열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실이 자신들을 지키지 못한 것을 비판하기보다 타국에 홀로 남겨진 옹주를 가여워합니다. 그들에게는 왕실의 혈육들이 곧 조선의 자존심이요, 조선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덕혜옹주는 37년간 돌아오지 못했나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항서를 낭독합니다. 따라서 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도 독립을 하게 되죠. 라디오에서 이 얘기를 들은 덕혜옹주는 그 길로 딸 정혜를 데리고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갑니다. 그러나 출국 심사에서 출국불가 처분을 받습니다. 덕혜옹주는 절망합니다. “나는 조선인이요. 그런데 내가 왜 못 간단 말이오!”
 덕혜옹주를 대한민국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것은 일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나라였습니다. 덕혜옹주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한민국에 돌아가지 못한 건 황실의 핏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광복 후 세 워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황족들이 귀국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광복을 절실히 바라던 조선의 국민들에게는 왕실에 대한 깊은 로열티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덕혜옹주마저 일본인에게 시집가고 전쟁으로 인해 일본 경제가 무너지자 더 많은 수탈이 이루어지고, 하루 먹고 살기도 바빴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공주나 황족의 안위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들이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건립해야 하는 시기에 왕족이 다시 들어온다는 것은 이승만 정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왕족이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은 적지 않고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입헌군주국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민들이 왕가를 향해 갖는 관심과 로열티가 얼마나 높은지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태국에서도 국왕이 서거하자 많은 국민들이 이를 애도했고 거리의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주말이면 왕궁 앞은 애도 행렬이 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애도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이승만 정권이 왕족을 다시 귀국시키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덕혜옹주는 몇 십 년을 또 돌아오지 못하다가 박정희 정권 때, 일본으로 간 지 37년 만에야 그리운 고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떠날 때는 14살 꽃다운 소녀였으나, 조현병을 앓는 51세의 중년이 되어 돌아온 것이죠. 그리고 말년을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창덕궁 낙선재에 돌아와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광복 직후 일본에 잔류하던 왕족들이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면? 그래서 왕족이 다시 복귀하고 왕정이 세워졌다면?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지금이야 ‘Republic of Korea’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아마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자체도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모습도, 분단 상황도,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죠. 우리나라에 왕족이 남아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봅니다.
 
 
정혜- 나는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소설에서 덕혜옹주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한 가장 큰 사건은 딸 정혜와의 갈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덕혜옹주는 가정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선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입국을 거부당한 충격에 정신 이상이 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책을 보면 딸 정혜와의 갈등이 그 도화선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타국 땅에 홀로와 유학생활을 하다 일본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 덕혜옹주에게 조선인으로서 자신을 지키고 자존감을 지키게 한 것은 자신의 피붙이, 정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분신과 동지와도 같았던 하녀 복순이마저 사라진 후 이 낯선 땅에서 섬이 되어 버린 터라 덕혜옹주는 딸에게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했던 것이지요. 이제 덕혜옹주에게 남은 것은 자신과 같은 조선 황실의 피를 물려받은 정혜였습니다. 덕혜옹주는 정혜에게 조선 왕실의 예법도 가르치고, 부용정을 비롯한 아름다운 궁의 정원 모습도 이야기해 주며 조선 왕가의 자손임을 잊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곧잘 듣던 정혜가 학습원에 다니면서 친구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게 되자 그 반응은 정반대가 됩니다. 학습원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정혜를 괴롭히고 놀리자 정혜는 조선인인 어머니를 싫어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조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하고 조선인이라는 어머니의 신분도 싫어합니다. 그렇게 반감은 높아져만 갑니다. 덕혜옹주는 자신이 낳은 딸에게 존재를 부정당하자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다 둘 사이가 갈라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본의 패망 후, 조선으로 함께 밀항하기 위해 덕혜옹주가 정혜에게 소량의 수면제를 섞은 음식을 먹였다가 그 사실을 들킨 것이지요.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한 정혜는 엄마인 덕혜옹주를 경멸하게 됩니다. 남편조차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결국 남편에 의해 덕혜옹주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혜는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한 그 다음해인 1956년, 유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발견되지 않아 7년 후 자살로 사망한 걸로 처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덕혜옹주가 아닌, 정혜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정혜라면 어땠을까. 나는 어머니 덕혜옹주의 말대로 조선 왕가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지고 언젠가 조선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으며 살아갈까요? 아버지처럼 일본인으로서 살아갈까요? 아버지 다케유키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까요?
 어쩌면 정혜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그것도 조선의 왕가의 핏줄이라는 사명감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에 대한 그리움과 왕가를 지켜야 한다는 자존감은 어쩌면 덕혜옹주 홀로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6월, 망국의 슬픈 비운을 안고 태어나 행복할 수 없었던 조선의 마지막 옹주를 기리며 낙선재로 한걸음을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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