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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나와 청소년문학]놀이로 배우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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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11-13 13:47 조회 5,48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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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률 소설가
 
공자의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즉, “아는 사람은 그걸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말. 여기선 학문, 즉 배움을 두고 한 말이겠지만, 나는 학문 아닌 다른 것에도 두루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논어가 비록 그 시대와 그 시대 이후, 또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 땅에 이르기까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식자나 권력자들의 ‘교재’이긴 했으나 이 말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일을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이는 일 자체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겠지만 일을 할 때에는 죽을 맛이거나 시큰둥한 자세였을 것이다. 그러나 즐겁게 일을 한 사람은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 일을 하는 동안도 즐거웠을 것이다.
청소년은 즐거운 놀이를 원한다. 공부도 즐겁게 놀이처럼 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이런 말을 하면 어른들은 “인생은 말이야, 어려운 일도 있게 마련이야. 세상 일이 절대로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청소년 때에 대비를 잘 해 두어야 해.”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청소년 때엔 오로지 공부만 하면 된다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부만 하면 만사형통일까? 더구나 그 공부는 오로지 대학을 가기 위한 시험공부이다. 그러기에 ‘너 죽고 나 살자’는 공부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른들은 또 어차피 인생은 경쟁이라며 핏대를 세운다. 그러면서 한술 더 떠 “공부해서 남 주냐?”라며 핀잔을 준다. 진정한 공부는 ‘공부해서 남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든 남을 딛고 살아야 하는, 이른바 적자생존 사회이다. 서로 같이 살 수 있는, 상생 사회가 아니다.
사실 어른도 노는 게 즐겁다. 오죽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노래가 있을까? 내 살아보니 절묘하게 맞는 말이다. 노는 것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아야 한다. 힘이 있을 때…. 잘 놀아야 잘 성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놀지 못하게 한다. 어른들 자신부터 노는 일에 인색하다. 실은 어른들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하여 세상을 배운다. 소꿉장난을 떠올려 보자. 소꿉놀이 때 아이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가상현실 속에서 논다. 그러나 어른들은 소꿉놀이를 하지 않는다. 승부가 있는 게임 같은 것을 더 즐긴다. 가상현실보다는 대결 구조를 갖춘 놀이를 하는 것이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나는 집에다 크고 작은 장난감을 많이 모아 놓고 있다. 모두 내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이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라고 했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란다!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있는 아이를 잃고 산단다! 노는 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물리학자는 피터 팬이어야 한다. 더 이상 자라선 안 된다.”라고. 시인이고 물리학자고 다 ‘아이’를 강조한다. 이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높이 사기 때문일 것이다.
놀이는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 놀이엔 기본적으로 어떤 이해관계가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그냥 자연스레 노는 일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냥 노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놀 때에도 훈수를 들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시큰둥해진다. 훈수는 곧 ‘꼰대질’이다. 어른들은 놀이도 생산적으로 연결되어 나중에 직업과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제 4회 사계절문학상 수상작인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는 비보이라는, 청소년들이 주로 추는 브레이크 댄스를 다루었다. 청소년들은 기본적으로 음악과 춤을 좋아한다. 요즘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의 청소년들을 보자. 열이면 열 모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귀를 막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춤추는 아이들의 심리도 마찬가지일 터.
아이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춤을 춘다. 춤을 추는 그 시간은 침해받지 않는 시간이며, 춤을 추는 장소는 어쩌면 그들의 ‘성소’인지도 모른다. 이제 학교는 성소가 아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학교는 성소였다. 일하기 싫으면 학교 간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학교 가는 아이를 붙잡으며 일하라고 한 부모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 스스로도 학교가 싫다! 학교는 잠시 도망은커녕 한 시간도 머물기 싫은 곳이다. 그런 학교에 아이들을 붙잡아 놓는다.
『몽구스 크루』의 등장인물들이 마냥 학교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이른바 ‘범생이’인 오진구는 비보이를 무척 좋아하기는 하지만 공부를 해야 ‘사람 구실’도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오몽구는 비보이에 미쳐 있다. 비보이가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도 아는 듯하다. 그러기에 더욱 비보이에 몰입하여 ‘그것’만 한다. 그의 이런 태도 또한 놀이로써 비보이를 하는 게 아니다 싶다.
놀이는 직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감을 ‘상실’하면서까지 즐겨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요구한다. 놀이가 생산적인 일로 연결되지 않으면 굳이 놀이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오로지 생산적이야 놀이도 의미가 있단다.
놀이는 현실을 배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판타지가 현실의 다른 모습이듯이 말이다. 그러나 청소년문학에서는 놀이가 반드시 직업으로 이어지는 노동이어야 한다. 노동은 무조건 신성한 것이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일까?
물론 노동은, 일하는 것은 신성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일을 더욱잘하기 위해선 놀이가 필요하다. 놀이가 반드시 생산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공부야말로 생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공부가 생산적인가? 마지못해 하는 게 생산적일 수 없다.
문학은 생산적인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비생산적이지만 오히려 생산적일 수 있다. 사실 생산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이기에 문학 작품을 권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이 생산성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맞다. 문학 작품 자체는 생산성이 없다. 소설이나 시가 돈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하지만 소설과 시는 돈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해 준다.
자본주의, 그것도 지금은 자본주의의 절정인 신자유주의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놀이 자체도 산업이 됐다. 어른은 물론 청소년도 스스로 놀이할 줄 모른다. 그래서 산업이 놀이를 소비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아이들은 놀이조차도 상품으로 소비해야 한다. 놀고 싶으면 놀이를 사는 것이다. 절대로 스스로 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추종자들인 자본가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운동경기도, 인터넷 속의 게임이나 만화 같은 것도, 심지어는 뉴스조차도 상품으로 소비하게 한다.
놀이산업의 주도자들은 청소년들을 주 고객으로 하여 그들의 놀이 욕망을 부추기되 묘한 쪽으로 유도하여 자기들의 잇속을 챙긴다. 아이들은 몸을 놀려 직접 놀 필요가 없다. 놀이산업가들이 이끄는 대로 ‘구경’만 하면 된다.
『몽구스 크루』 이후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춤 등을 소재로 한 그들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 많이 나왔다. 최근에 나온 한정영의 『오드아이 프라이데이』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프리러닝을 즐기게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프리러닝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홍명진의 『우주 비행』의 등장인물인 승규는 탈북 청소년으로 음악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나간다. 박선희의 『도미노 구라파식 이층집』의 등장인물인 몽주와 도현은 마술 놀이를 즐기며 가족 붕괴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김혜정의 『하이킹 걸즈』의 등장인물들은 이른바 문제아들이다. 이들은 소년원에 가지 않기 위해 여행에 참여한다. 이들에게 여행은 놀이이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면 성장해야만 하는 놀이이다.
놀이를 끝내고 나면 반드시 성장해야 하는가? 작가들, 특히 청소년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성장에 대해 너무 강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생각엔 굳이 성장 안 해도 된다. 반성장을 통해서도 성장의 서사를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공자도 “아는 사람은 그걸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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