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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잡이 길잡이 내 옷자락을 잡고 서 있었던 - 정선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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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8 22:53 조회 5,90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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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 급했다. 두 시간 동안 정선(가명, 중1 여)의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구체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소소한 여자 아이들의 감정싸움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내 전화기에는 가출한 아이, 아빠에게 맞는 아이, 당장 죽어버리겠다고 울고 있는 아이들의 문자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꾸 정선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손은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문자를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래서요 아무래도 반 아이들도 절 싫어하게 될 것 같아요. ○○이는 우리 반에서 친한 아이들이 가장 많은데 그 애가 싫어하면 다 말하고 다닐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 자꾸 눈물이 나요. 애들이랑 이야기할 때도 자꾸 눈물이 나서 애들이 이야기하자고 하면 자꾸 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정선이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반에 같이 노는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다른 아이를 사귀게 되어 같이 놀았는데 같이 놀다보니 원래 같이 놀던 아이보다 새로 만난 친구가 좋고 이제 원래 친한 아이랑은 안 놀고 새로 친해진 친구하고만 놀고 싶은데 오히려 그 둘이 놀고 자신은 따돌리려고 할 것 같다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한데다 시간도 오래 걸려서 종이에 그려서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를 물었다. 정선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도 제가 답답하시죠?” 하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분명 내 얼굴에 티가 났을 것이다. 정선이의 울음에 놀라서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에서 손을 떼었다. 아이들의 아픔이 상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정선아! 내가 미안해. 네 말을 성의 있게 못 들어준 것 같아. 한 번만 봐주라.”
그러자 정선이는 눈물을 닦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주위를 맴돌았는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저를 여름방학 때 처음 보셨다고 하셨죠? 저는 3월부터 봤어요. 처음 본 것은 도서관에서였어요. 항상 아이들이랑 어울리고 책을 추천해주고 하시던 모습을 보고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 추천해주신 책을 저도 읽었어요. 지금 저랑 노는 아이들은 모두 책 읽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몰래 읽어요. 집에서도 엄마는 세계명작 같은 걸 읽지 소설책 같은 것은 읽지 말라고 하시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이 추천하신 책 중에는 세계명작은 없었어요. 소설이 많았지…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몰래 읽었어요. 처음에는 선생님이랑 책 읽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3학년 언니들처럼 독서토론도 해보고 싶었고… 그런데 선생님, 그거 아세요? 선생님이 어려워요. 다른 애들은 선생님이 편하다고 하는데 전 어렵기만 했어요.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을 것은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방학 때 선생님이 도서실에 계실 때 사실 일부러 그 시간에 친구들이랑 거기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갑자기 유치원 책읽어주기 자원봉사자가 모자란다고 하신 이야기도 듣고 계속 도서실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방학 동안에도 선생님은 너무 바쁘셔서 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없더라고요. 사실 이렇게 우울한 상황이 되어 선생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고 얼마 전 ○○이가 언니들이 괴롭힌다고 학교를 못 다니겠다고 할 때 선생님이 해결해 주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된 거구요… 선생님! 죄송해요. 저 꼭 스토커 같죠?”

걱정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
관심을 가져주니 정선이는 처음보다 훨씬 조리 있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더러 답답하대요. 그리고 항상 표정도 어둡다고 해요. 입도 튀어나왔고… 그래서 항상 입을 내밀고 다닌다고 애들이 불만 있냐고 그래요. 저도 제가 싫어요. 그런데 자꾸 걱정이 되는 걸요. 하루 종일 걱정만 하고 살아요. 잘 때는 걱정하다가 지쳐서 자는 것 같아요. 걱정이 없는 날은 환경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걱정할 정도라니까요. 그러다 보니 점점 표정도 어둡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책도 자꾸 그런 책을 찾아 읽게 돼요.”

정선이는 예쁜 얼굴이었다. 입술이 두꺼운 편인데 온통 터 있었다. 자꾸 입에 침을 바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하얗게 되어 얼굴에서 입술이 눈에 띄어서 더 부루퉁한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정선이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했던 것이 무척 후회되었고, 저 정도라면 정선이의 엄마도 알았을 텐데 싶어서 물어보았다.

“엄마는 항상 바빠요. 아침에 계시기는 해요. 남동생 학교 가는 준비하느라 얼굴은 못 보고 목소리만 들어요. 제가 일어나면 엄마는 언니의 교복을 털어주는데… 전… 제가 해요… 그리고 엄마도 일을 다니시기 때문에 잘 못 보고… 언니랑 남동생 챙기는데도 엄마는 많이 힘드실 거예요. 저라도 알아서 해야 하는데 사실 엄마를 많이 못 도와드리고 있어요. 엄마가 불쌍해요. 아빠도 안 도와주고… 우리 집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에요.”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이
정선이가 찾고 있었던 것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께 정선이 어머니에 대해 물어보니, 학부모회의 때 잠깐 왔다가 정선이는 항상 자신의 일을 잘 알아서 하는 아이니 문제없을 것 같은데 어떠냐고 물어보고, 문제없다는 답을 듣고는 바로 언니네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가버리셨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지만 다시 오시지 않아서 선생님도 조금 기다리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했다. 정말 정선이는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였다. 공부도 못하는 편이 아니었고, 교실에서 보면 친구들과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맞추어 주려고 할 정도였다.

정선이의 이야기를 듣고 네게도 엄마가 필요한 나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한테 미안해하지 말고 엄마 얼굴을 보고, 엄마에게 안길 필요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걱정거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또, 담임선생님에게도 정선이에게 칭찬을 많이 해달라고 부탁했다. 중학교 3학년인 언니와 초등학교 1학년인 남동생만큼 정선이도 관심을 받아야 할 아이였다. 그런데 나 역시 상대적으로 급한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서 내게 다가오고 있는 정선이를 못 보고 있었던 것이다. 팔이 부러진 아이가 있으니 손가락이 부러진 아이에게 넌 아픈 것도 아니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요즘은 정선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있다. 선생님이 바쁘실 테니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우울한 책을 읽고 문자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문자도 내게 방해될까봐 한 번 오면 몇 분까지만 한다고 정해두고 문자를 한다.
참, 정선이가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그 이유는 내 립글로스를 발라주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변화 하나가 아이의 인상을 바뀌게 하였다. 정선이도 거울을 보고 꽤나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정선아! 네가 행복해야 남들도 행복해지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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