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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교사 삼국지에 얽힌 오해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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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2 19:40 조회 5,67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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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펴냈던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에는 <삼국지 읽지 마라?>란 글이 실려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삼국지를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일으킬 정도로 너도나도 삼국지 예찬론을
펼치는 것에 딴죽을 걸고, 혹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어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경쟁 그 자체를 나쁘다 할 수는 없지요. 경쟁만 있는 것이 문제
입니다.

나는 배려하고 함께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가치 있다 생각합니다. 가끔 학생들에게 이
런 질문을 던집니다. 동계올림픽에서 보았지만, 스피드 스케이팅할 때 선수가 혼자 뛰지 않고
둘이 짝을 이루어 같이 뛰지요. 왜 그럴까요? 금세 답변이 나옵니다. ‘경쟁을 통해 기록을 단축
하려고요’라고.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같이 뛰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 비록 성적이
뒤쳐졌더라도 같이 뛴 사람도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이네요. 그럼, 조금 뒤늦게 ‘그렇겠네요’라는
답변이 나오지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익숙하다보니, 아직 기쁨을 나누고 감사하
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삼 국 지 , 서유기 그리고 실크로드
강연을 갈라치면, <삼국지 읽지 마라?>에 나온 내용을 물어보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중학생
부터 성인까지 나이에 관계없이 두루 물어봅니다. 학생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할까 말하지 못했
으나, 성인한테는 답변해준 내용이 있습니다. 조금 쉽게 풀어 설명해볼 테니 왜 그런 말을 했는
지 이해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나는 그 글에서 삼국지를 읽지 말라고 과격하게 발언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읽지
말자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의식을 같이했으면 하는 마음에 던진 말이지요. 굳이 읽고 싶다면,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를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삼국지만 읽지 말고 서유기도 읽어
보자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는 ‘병법’을 일러주는 삼국지
는 무한경쟁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삼국지가 널
리 읽히는 데는 시대정신과 가까운 관계가 있는 듯싶고, 이 시대정신을 과연 긍정적으로 볼 수
만 있을까요? 더욱이 청소년 시기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접해보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권
모술수와 음모 음해가 남발하는 삼국지를 꼭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연히 삼국지의 장
점은 있습니다만, 이 점을 너무 쉽게 지나쳤다는 거지요.

비유를 들어 달리 설명해 보겠습니다. 몇 해 전 가까운 이들과 실크로드를 여행한 적이 있습
니다. 아직도 그 풍경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행복하고 깨달음 많은 여행이었습니다. 둔황 인
근을 지날 적에 서유기에 나온 화염산을 보았습니다. 길라잡이가 과장을 하며 화염산이 얼마나
뜨거운지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다 문득 들었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실크로드라 하면, 비단
길로만 압니다. 중국에서 짠 비단이 서양까지 흘러들어간 길이라는 뜻이지요. 거꾸로 서양에서
보석 같은 것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지요. 지금 말로 하자면, 황금노선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위험부담은 높지만 그만큼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기회의 길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또 다른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다는 점을 그때 눈치챘더랍니다. 내가 여행한 서안에
서 둔황까지는 따지고 보면 숱한 스님이 인도로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자신의 조국에 가
져오기 위해 걸어간 길이기도 합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도 그러했고, 둔황에서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혜초도 그러했습니다. 좀 쉽게 말하자면, 둔황에서 왼쪽으로 돌았
으면 인도요, 오른쪽으로 틀었으면 로마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는지요? 화염산을 지나며 내가 무릎을 치며 깨달았던 것은, 삶은 그 무
엇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실크로드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상징합니다.
비단을 요구하는 시장을 향해 사람들은 그 먼 길을 떠났습니다. 험산험로를 거쳐야 했는데도 숱
한 사람들이 비단을 들고 서쪽으로 갔기에 길이 열렸던 거겠지요. 어찌 가져가기만 했겠습니까.
가져온 것도 있으려니, 보석 따위가 그것이지요. 이 길을 오락가락했던 사람들의 꿈은 더 나은 경
제적 삶이었을 겁니다. 이 비단이나 보석을 팔면, 더 많은 수익이 생겨 더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했기에 그토록 먼 길을 목숨을 걸고 다녔을 터입니다. 이게 잘못된 건가요? 이것을 무시할 수 있
나요? 사람들은 실크로드를 일러 문명 교류의 상징이라 합니다. 오히려 칭찬받고 있는 것이지요.

실크로드, 말씀의 길
나는 말하자면 실크로드가 삼국지 같은 정신이 만든 길이라 봅니다. 살아남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걸어간 인류의 욕망이 터놓은 길입니다. 훗날 어떻게 평가하든 사실은 돈 벌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이지요. 그 욕망이 얼마나 컸던지, 사막과 높은 산맥으로 가로막힌 곳에 사람과 짐승
이 다닐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에는 욕망 충족을 위한 몸부림이 분명히 포함
되어 있습니다. 이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삶의 한 면으로 당당히 인정해
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니라 하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크로드가 한갓 장사꾼의 길이라면, 이름값을 못하고 얼마나 초라해지는가요.
오로지 더 따뜻하고 더 배부르고 더 화려하게 입고 싶어 떠났던 사람들의 걸음이 다져놓은 길이
라면, 어딘가 속물적이고 어딘가 천박해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실크로드는 말씀의 길이기도 합
니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으로 중생들이 구원받아 해탈의 경지에 오를 길을
찾는 무리가 목숨을 걸고 걸었던 길입니다. 그 길은 구도의 길이었으니, 먼저 자신의 업을 사르
고 깨달은 자가 되고자 했으며, 거기에 멈추지 아니하고 뭇 중생들도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
록 이끌어 주려는 열망이 담긴 길입니다.

옛날, 인도로 말씀을 구하러 갔던 무리는 많습니다. 애니메이션 탓에 서유기가 마치 손오공
이 주인공인 무협지처럼 되고 말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장법사가 당나라를 떠나 인도로
여행을 갔던 것도 중생을 구제할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장법사 무리가 만난 요괴들
은, 그러므로 참된 것을 구하려는 사람이 맞닥뜨리는 자신의 욕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을 이겨내야 진정한 것에 이를 수 있는 법입니다. 아, 그러니 그들이 걸었던 길을 다음부터는 실
크로드라고만 부르지 말고 말씀의 길이라고도 해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을 서유기의 길
이라 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진정 열망해야 할 가치
참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것, 참된 것, 변치 않는 것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얼마나 없어 보이겠습
니까.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 잘 하는 종족이었다면 생태계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낮아졌을 터입니다. 인류가 문명을 일구어내고 정신영역을 가꾼 데는 말씀에 대한 열렬한 추구
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우쭐해지는 순간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입니다. 그야말
로 생식生食/生殖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하려는 날갯짓이 그 사막 한복판에 아
스라한 길을 만들었다니 말입니다.

내가 지금 모순된 말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실크로드를 만든 힘이 세속적 욕망이라 해놓
고는, 그 길을 만든 또 다른 힘이 말씀에 대한 열망이라 했으니 말입니다. 나는 모순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두 길 자체가 바로 삶의 진면목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가요? 우리 삶은 그 무
엇 하나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속적 욕망만으로 사는 것도 옳은 삶은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짐승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말씀에 대한 열망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자리는 종교인이 서 있을 곳입니다. 그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요. 모두 사찰이나 성당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요.

그러니 우리 삶은 삼국지의 삶과 서유기의 삶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길로만 가지 아니하고 두 길을 다 함께 걸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
적 욕구를 충족시켜나가야겠지만 여기에만 빠지지 않고 진정한 것에 대한 열망에도 충실해야 합
니다. 어렵겠지요? 당연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긴장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느 한 길로만 갔지요.

가만히 보니, 공자께서도 이런 고민을 하셨던 듯합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에서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어요. 온고는 옛것을 익히는 것을 가리키고, 지신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것만을 좋아합니다. 고가의 명품 가운데 신상품을 좋아하는 여자
를 일러 ‘신상녀’라고도 했잖아요. 휴대전화도 지금 당장 나온 것들이 좋아 보이잖아요. 아이폰
열풍이 이를 입증해주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옛것을 버려도 될까요? 옛 사람들이 말한 것 가운
데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는지요? 거꾸로도 문제입니다. 고리타분하게 옛것만이 진실하고 오늘 것은
다 가짜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요. 삶의 진리는 어디에 놓여 있을까요? 온고
하면서도 지신하고, 지신하면서도 온고할 줄 알아야지요. 온고는 말씀의 길, 서유기의 길일 수
있고, 지신은 욕망의 길, 삼국지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두 길 가운데 어느 한길을 쉽게 버려서는
아니 되고, 팽팽하게 맞서 있는 두 길 사이에 나 있는 작은 길을 걸어가야 할 터입니다. 그것을 일
러 옛사람들은 중용이라 했지요.

말씀과 함께 걷는 길
여러분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려 하는지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시공부만 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나쁠 리 없지만, 우리가 반
드시 기억해야 할 다른 길은 놓치고 있는 꼴입니다. 말씀의 길은 읽기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를 되돌아보게 하고, 두루 살피게 하고, 먼 앞날을 내다보게 합니다. 이것이 없고서는 우리가 중
용의 길을 걸어가기 어렵습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친 길을 걷게 되지요. 그러다 탈선
하고 맙니다.

과학책을 읽다가 생명의 비밀이 담긴 DNA가 이중나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중나선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물질이 엮어있는 것을 말하잖습
니까. 오호라, 생명도 서로 다른 길이 하나로 엮이며 서로 필요로 해야 가능하구나! 삼국지만의
길로 가도 아니 되고, 서유기의 길로만 가서도 아니 됩니다. 두 길이 합쳐지는 곳, 두 길이 맞서
며 일으킨 긴장이 새롭게 열어놓은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해서 성공한
삶, 성공해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게 될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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