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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티베트의 자연과 역사를 통해 삶의 본질을 묻다 - 중국작가 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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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7 22:22 조회 7,03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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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어와 중국어의 경계에서
박상률 제가 아라이 선생을 알게 된 건 『소년은 자란다』 때문입니다. 한국 작가 채만식蔡萬植 선생이 1940년대에 발표한 소설 가운데 「소년은 자란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마침 그 작품을 현대 한국어로 다시 고쳐 쓰는 작업을 제가 몇 해 전에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의 번역 소설이 얼마 뒤 나오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어? 이거 뭐지?’ 하는 호기심 때문에 아라이 선생의 작품을 보게 되었지요.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오늘 뵙게 되었는데…… 아라이 선생은 중국 문단에서 활동하지만 티베트 출신이란 말이지요. 선생께서는 작품을 쓸 때 어떤 언어로 먼저 생각하고 쓰시는지요?
아라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중국어로 구상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중국어가 아닌 티베트말로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대화일 경우인데, 티베트 사람들의 대화 방식은 한족과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 습관대로 티베트어로 대화를 만든 다음에 제가 중국어로 번역을 합니다.
박상률 일차 언어로 티베트어를 먼저 배웠겠지요?
아라이 엄마한테 먼저 배운 것은 티베트어인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여섯 살부터 중국말, 즉 한어를 배웠습니다.

박상률 한국의 작가들도 서울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지방어로 언어생활을 시작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전라도 사투리를 먼저 배웠지요. 근데 학교에 들어가면서 문자 생활은 표준어로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그릴라치면 나의 모어라 할 수 있는 전라도 말이 표준어보다 대상이나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반영합니다. 크게 보면 별 차이가 없는 한국어인데도 미묘한 부분에서 차이를 느끼지요. 그런데 티베트어와 중국어는 차이가 굉장히 있을 텐데, 티베트어로 생각한 것을 중국어로 바꿀 때 내면에 어떤 혼란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아라이 한국어의 표준말과 사투리 사이에는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도 미묘한 부분에서 차이를 느낀다고 했는데, 중국어와 티베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에 학교에 들어간 뒤에 배운 중국어와 이미 알고 있는 티베트어 사이에 큰 혼란은 없었습니다.

박상률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언제, 왜 작가가 되었는지요?
아라이 원래 농민 가정에서 자라며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작가가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마침 80년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때는 농민도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뭘 할까 고민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어떤 작가가 연 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쓴 작품이나 강연 내용이 대단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나도 해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날 만난 작가는 그 지역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단점을 꼬집으며 비평을 했습니다. 그 작가의 작품은 마오쩌둥 시대에 흔히 있었던 진실이 왜곡된 작품으로, 일종의 선전문구 같은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굉장히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작가와 심한 쟁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저의 반박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니까 “그럼 너 한번 써봐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훗날 책을 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써 두었던 일기를 훑어봤는데, 그 작가의 작품보다 나은 것 같아서 출판사로 가져갔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를 외우고, 배우고 하기 때문에 많은 표현을 시로 하지요. 그래서 저의 일기에도 시가 많았고, 출판사의 편집자들에게 그 시를 보이자 바로 첫 번째 시집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티베트의 진실
박상률 『소년은 자란다』도 그렇고 『색에 물들다』도 그런데 결국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느껴지거든요. 고향이든 삶의 체험이든. 아라이 선생이 저하고 같은 또래로서, 우리 세대는 상당한 격변기를 거쳤지요?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였겠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라이 선생은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결국은 자기 고향, 자기 종족에 내려오는 이야기들, 거기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 그것을 몇 십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고 문학은 역사 앞에서 느꼈던 저마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거든요. 지금 선생이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이유,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티베트도 분명 한 4, 50년 전하고 지금은 많이 다를 텐데 지금 그때 일을 계속 이야기로 쓰는 의도는 무엇인지요? 다시 말하자면, 본인이 어려서 겪었거나 그동안 내려오던 원체험들이 지금 작품에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게 티베트의 역사와 지금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작가의 몸속에 들어 있는 기억과 어느 정도 간극이 있는지 궁금해요.

독자는 어떤 문학책을 보고서 단순히 그냥 역사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선생님의 작품에 나오는 수트랄지 투스, 이런 것들. 아, ‘티베트에 이런 게 있었어? 그게 50여 년 전 얘기 같은데, 작가가 지금 들먹이는 의도는 무엇일까?’하는 생각들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사실들이 전혀 안 통할 수가 있거든요. 아무튼 그런 옛날 사실들을 역사적인 기록물로 보여주지 않고 문학적으로 다시 구성했을 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궁금합니다.
아라이 원래 티베트 사람들의 역사서는 티베트 사람들이 직접 쓴 것이 별로 없습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는 라마승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역사를 재구성해서 낸 것이지요. 저의 소설처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중국말로 티베트의 역사를 써 놓은 것은 없었어요.



박상률 그래서 티베트에선 지금 문학이 역사를 대신하고도 있다고 봐도 된다는 얘기인가요?
아라이 지금은 중국정부가 티베트의 역사를 쓰고 있는데 그것도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쓰고 싶은 내용만 쓰는 것이지 모든 역사를 다 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방식으로, 작가의 시각으로 쓰고 싶었고, 그래서 문학의 형식을 빌려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쓴 책은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책이니까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상률 한국에 소개된 두 작품을 보고 느낀 점은 아라이 선생의 소설이 문어 투가 아니고 구어 투, 그러니까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야기다, 이야기 자체인 것 같다, 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이한테 계속 들려줬던 입말 투의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아라이 선생의 소설작법을 보면 서구적 소설의 어떤 기법을 차용해서, 예를 들면 기승전결이나 반전 같은 것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입말로 해주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아무데서나 끝나도 되는, 그런 식의 이야기이고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렇게 이해해도 되는지요?

아라이 저는 서양의 책을 많이 봤고, 저도 그런 방식으로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으로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어서 말씀하신 대로 이야기 방식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박 선생께서 굉장히 날카롭게 보신 건데, 티베트 사람들은 글자를 모르거나 특히 문어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방식이 상당히 발달돼 있고, 그 풍부한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바탕 삼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그걸 표현하는가를 유의 깊게 들은 거지요.

박상률 우리도 시골에서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또는 동네 사랑방에 나가서 들은 얘기들이 있습니다. 얘기가 어디에서 끝나도 상관이 없고, 나머지는 또 내일 들어도 되고, 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결말을 적당히 맺어 알아서 끝내도 되는 것들이었지요. 근데 이런 거를 봤을 때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꼭 문자로만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입말로, 문어가 아닌 구어도 문학일 수 있구나, 하는 걸 아라이 선생의 작품에서 느꼈다는 것이지요.
아라이 이런 이야기를 위해서 지금도 매년 또는 2, 3년에 한 번씩 꼭 티베트 지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구전되는 얘기를 듣습니다. 여행하면서 얻는 것이지요.
박상률 그거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좀 가벼운 얘기를 해볼까요. 아라이 선생이 작가 생활을 하면서 지니게 된 문학관, 즉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문학을 한다, 이런 걸 듣고 싶습니다.

아라이 세계 곳곳의 민족이나 문화는 각기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의 부분들이, 즉 공감하는 정서 같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문학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으로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 여기 오면 전혀 다르다, 여기와 저기가 다 다르다, 라고 말하겠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은 각각 차이가 나는 지역에 살아도 서로 같은 점을 갖고 있구나, 하는 부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거나 제대로 모르거나 하는 부분이 많은데, 제가 책을 통해서 적어도 티베트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진실을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을 쓰는 작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원래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종교권력자들인데, 그 사람들은 제 방식을 싫어하고 정부의 정치인들도 싫어하지만, 저는 이렇게 씁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해학적이고 낙천적으로
박상률 작품을 보면 심각한 얘긴데 전혀 심각하지 않게, 어찌 보면 의뭉스럽게 또는 해학적이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낙천적인 이야기로 갈 수 있었던 것은 불교의 영향인지, 아니면 티베트 사람들 성격이 전부 이렇게 낙천적인지, 아니면 작가 특유의 낙천성인지 궁금합니다.

아라이 일반적으로 티베트 사람들은 몹시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옛날이야기하는 방식을 빌려 자신들의 삶을 구전해 오고 있고, 저는 그것들을 글로 표현해내려고 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데, 제가 그것을 확대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박상률 선생님 작품을 보면 도시와 자연, 중국정부의 국가폭력과 티베트의 전통적인 권력 같은 것이 이분법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정부의 국가폭력과 전통적인 세력, 도시와 자연과 현대문명 속에서 작가 자신이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을 겪지 않고 어떻게 견뎌 나왔는지요?

아라이 『색에 물들다』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부터 1950년까지 공산당이 티베트 지역으로 막 온 시점에서 끝났거든요. 그런데 그때서부터 지금까지, 즉 1950년부터 2000년까지의 역사는 『빈산(空山)』에 담았습니다. 빈산이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권이 티베트의 백년 역사인 거죠. 이전 오십 년 이야기 『색에 물들다』는 ‘투스’라고 하는 티베트의 마지막 왕족 일가의 이야기이고, 『소년은 자란다』는 평범한 티베트인들이 나오는 마을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박상률 전체이면서 더 나중 이야기가 되는 거군요, 투스가 몰락한 이후로.
아라이 네. 공산당 체제 아래서는 왕족이 존재하지 않으니 공산당이 마을로 들어온 뒤에 티베트인들이 사는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떤 변화가 그 뒤로 왔는지…….
박상률 ‘투스’라는 게 말하자면 옛날 중국식으로 하면 ‘영주’죠?
아라이 자기 자신은 황제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의 황제가 지방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을 투스라고 합니다. 국왕이라는 뜻이지요.

박상률 티베트는 제 상식으로는 불교와 정치권력이 일치했던, 정교일치사회 같은데, 인민들의 삶에 라마불교의 라마승들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또 투스는 뭐든 자기 마음대로 했는지요?
아라이 투스란 티베트 전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티베트 지역을 여러 곳으로 나눠서 통치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방은 투스의 힘이 더 세고, 어떤 곳은 라마의 힘이 더 강하기도 했습니다.
작가, 무너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자
박상률 『소년은 자란다』는 청소년 독자를 의식했는지, 아니면 그냥 일반 독자를 생각하고 썼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작가들은 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아라이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쓴 건 아닙니다. 원래 이 작품은, 3년 동안 『빈산』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를 수집했는데, 역사적 성격이 강한 것은 『빈산』에 쓰고 티베트인 개개인의 삶을 다룬 것들은 『소년은 자란다』로 출간한 것입니다. 『색에 물들다』는 지난 역사 이야기고 저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기 때문에 1년 만에 썼습니다. 그런데 『빈산』을 쓸 때는 저와 너무 밀접한 시기를 쓴 것이기 때문에 때로 너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쓰기 싫을 때도 있고 힘들기도 하고 해서 3년 넘게 걸려 썼습니다.

박상률 작가의 작품은 아무리 옛날 얘기라 하더라도 결국은 작가의 모습이 투영될 수밖에 없잖아요. 『소년은 자란다』에 나오는 단편의 주인공과 『색에 물들다』에 나오는 ‘바보왕자’ 같은 주인공은 참 매력적인데, 이 전체 작품 속에서 볼 때 가장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누구인지요?

아라이 『색에 물들다』에 역사를 기록하는 서기관이 나오는데, 바른말을 하다가 형벌로 두 번이나 혀를 잘립니다. 그 서기관이 작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인은 말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박상률 그거 굉장한 상징이었거든요. 그런데 『소년은 자란다』에 나오는 소년 주인공은 왜 그렇게 다 착한지요?
아라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뭐 몇 가구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외부 세상을 모르고 사는, 순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박상률 여기에 나오는 10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거의 인생을 달관한 느낌인데, 그 달관한 듯한 자세의 근본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티베트의 자연환경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도시문명에 물들지 않은 데서 나오는 건지, 그도 아니면 불교적인 생활태도나 세계관에서 나오는 건지요?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에 등장하는 많은 아이들처럼, 티베트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몹시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옆에서 어른들의 일을 도우며 아까 말한 달관한 것처럼 편안하게 사는 어른들을 보고, 그들의 생각과 말에 동화되어 그들의 인생관을 배워 자기도 모르게 어른들처럼 달관한 모습을 보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옛날처럼 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책에서처럼 여전히 순박하게 농사짓고 자라면서 순수한 모습을 간직할 텐데, 지금은 변화의 바람이 불어서 변해가고 있습니다.

중국정부에서는 모든 아이들을 교육시키라고 하는데 교육을 받은 아이들 중 극소수의 아이들, 즉 한두 명만 대학에 들어가고 성공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뒤 대학에 떨어져, 더 이상 성공의 길로 접어들지 못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아이들은 어설프게 교육을 받아서 농사도 짓기 싫어하고, 온갖 유혹에 빠져 성실한 생활을 하지 못하죠. 그런 모습을 자주 보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이 교육받는 것도 크게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과도기라고 생각하는데, 티베트인 전체의 문화적 수준이 올라간다면 좀 달라질 것입니다.

박상률 세상 어디나 다 똑같네요.
아라이 제 어머니도 티베트인 마을에 사는 시골분이어서 제가 글을 써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믿지 않고 나쁜 짓해서 돈 벌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조금씩 믿으시죠.


박상률 선생님의 작품을 티베트 사람들이 더 많이 읽는지, 아니면 중국 사람들이 더 읽는지요?
아라이 티베트인의 인구가 중국인에 비해 훨씬 적으니까 당연히 중국 사람들이 많이 읽지요. 그리고 한족 사람들작가은 문학작품으로 보지만 티베트인의 시각은 다릅니다. 특히 종교인, 즉 라마승들은 제 작품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우리 티베트인 속에서 큰 작가가 나오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어째서 모든 걸 다 밝히느냐는 거지요. 종교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숨길 건 숨겨가면서 역사를 써 온 것인데. 예를 들어 라마가 사람 죽이는 얘기가 책에 나오니까 자신들이 언제 사람 죽였냐고 항의를 하면서 왜 그런 것을 쓰느냐며 싫어했죠.

박상률 어찌 보면 작가로서는 격변기를 거친 것이 큰 자산일 수 있지요. 티베트 사회의 전통적인 것도 많이 무너졌을 테고, 또 지금은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자치구처럼 되어 있잖아요. 아무튼 무너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자가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죠. 일제부터 6.25전쟁 겪으면서 또 민주화 과정에서 격변기를 엄청 겪었잖아요. 물론 종류는 약간 다르지만 격변기를 거쳐 온 작가로서 쓸 얘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구상하고 계신지요?
아라이 사실 티베트는 당나라 시대 이후로는 늘 중국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배를 습관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대 격변기의 역사 100년을 저는 두 권의 책에 다 썼습니다. 언젠가는 수십 몇 년 동안 겪은 도시 생활에 대해 작가로서 느끼며 살아온 삶을 표현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선은 티베트에 관한 얘기를 몇 편 더 쓴 뒤에요.
박상률 짧은 시간에 아라이 선생의 문학세계를 다 알기는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개관은 한 것 같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고맙습니다.
아라이 고맙습니다.

아라이(阿來) 1959년 중국 사천성 서북부 장족 자치국(티베트)에서 태어나,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 중 한 명이다. 1998년에 펴낸 『색에 물들다』는 20여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으며, 『소년은 자란다』는 아라이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성장소설로 순박하고 정감 넘치는 인물들이 따스하게 그려져 있다. 현재 중국 사천성 작가협회 주석 직을 맡고 있다.

박상률 1990년 「한길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뒤, 성장소설 『봄바람』, 『나는 아름답다』, 『밥이 끓는 시간』 등을 통해 소년문학의 발전에 힘써 왔다. 현재 계간 「청소년문학」의 편집주간, 월간 <학교도서관저널>의 기획위원으로 있다.

전수정 중국문학 전문번역가로, 중국 성장소설 『청동 해바라기』, 『빨간 기와』, 『열혈 수탉 분투기』, 『나는 개입니』, 『안녕, 싱싱』, 『늙은 어부』, 『소년은 자란다』 등을 국내에 번역 소개했다. 현재 유한대학 강의전담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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