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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저자 [독자가 만난 작가] 김금숙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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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7-12-05 14:16 조회 4,50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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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공항시장 인근 카페에서 만난 김금숙 작가와 헤어지고 돌아온 날 든 생각이다. 이날에 대해 근사한 수식을 붙일 재간은 없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강단, 맑은 눈매, 나무와 같이 느껴지는 정직함. 꾸준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고민했으며, 나눔의 집에 찾아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오래 들었고, 아파했고, 할머니의 생채기를 또 다시 내지 않기 위해 작가는 한 땀 한 땀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런 끝에 장편 만화『 풀』 이 나왔다. 그리고 작가는 여전히 할머니들의 봄을 기다린다. 그는 지금껏 그랬듯이 아픈 현대사 속에서 살다가거나 지금 여기를 꿋꿋이 살아가는 삶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제 안의 서랍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그 속에서, 낮지만 단단한 소리 하나가 들리는 듯하다. 그중 하나를 여기에 펼쳐 보이고자 한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할머니들의 삶의 기록을 면면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여민 이야기를 펼쳐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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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노래』를 보면 고흥에서 살다가 일찍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하셨는데, 당시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땐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짓기가 힘들고 먹고 살기도 어 려웠어요. 삼촌들이 전부 서울에 올라와 계셨고, 서울로 가면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주위에 떠돌아서 어머니께서 밭이랑 논을 정리하신 후 온가족이 서울로 올라왔어요. 공항동에서 살았는데 그 동네에 논이 많았어요. 제 꼬맹이 시절 이야기인 『꼬깽이』에서처럼 저는 서울에서도 머슴아이 같고 강단 있었어요.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는데 어머니께서 머리에 이가 많아진다며 죄다 밀어버리신 거예요. (웃음) 어머니께선 삼촌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평생 희생하며 사셨는데, 큰삼촌이 어머니의 재산을 다 판 뒤에 그 돈을 사업에 투자해서 전부 날려 버렸어요. 가세는 조금씩 기울였고, 큰삼촌은 결국 감옥에서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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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께서 둘째 딸이었고 언니인 첫째 딸은 수양딸로 가셨다면서요?
 맞아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탄광에서 일하셨는데 워낙 먹고살기 힘들어서 저희 엄마의 언니를 수양딸로 보내셨어요. 그러고 난 뒤에 한국전쟁이 터져 본래 사시던 남쪽으로 내려오셨는데, 제 언니를 찾으러 애썼지만 못 데려오셨대요. 이후에 저희 어머니 빼고는 모두 남동생이다 보니, 일할 사람이 딸밖에 없던 거예요. 어쩌면 이는 『풀』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예요. 언니나 누나 들이 가족들을 위해 평생 희생했으니까요. 제가 살던 시대 역시 여성이 희생을 강요받던 분위기였는데, 그나마 저와 제 동생은 막내로 태어난 행운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시게 된 계기는요?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제 담임선생님께선 회화를 전공하신 분이셨어요. 제가 다니는 반전체가 미술반으로 정해졌고 미술 사생대회가 있을 때마다 반 전체가 참석하곤 했어요. 오전에 한 시간, 오후에 한 시간씩 하루에 최소 두 시간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러다가 미술학원에 갔는데, 저는 가난했지만 지는 게 싫어서 걔네들이 미술학원에 가면 부끄러운거 모르고 돈도 안 들고서 쭈뼛쭈뼛 쫓아갔어요. 그런데 그 학원 선생님이 저를 보시곤 애가 좀 독특하다 싶으셨나 봐요. 어찌어찌 두 달 정도 학년엘 다녔고 미술에 점점 흥미를 느꼈어요. 그 이후로는 어딜 가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릴 들었어요.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은 언제였나요?
 중학교 1학년 때 멋진 미술반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가 그림을 좋아하니까 집에서 매일같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선 학교에 들고 가서 선생님께 보여 드렸어요. 선생님께서도 그런 저를 지켜보셨고, 어느 날 제게 서울현대미술관으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 한 번도 서울 시내를 가본 적이 없어서 굽이굽이 미술관으로 찾아갔는데,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터너 수채화전이 크게 열리고 있었어요. 저는 윌리엄 터너의 색채 감각에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런 그림이 있구나!’ 싶었죠. 이후부터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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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가야겠다고 의지를 굳힌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희 집이 힘들게 살았기에 저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면 얼마나 자기 꿈을 이루기 힘든지 몸소 느꼈어요. 게다가 그 시대에 저는 여자로 태어났잖아요. 차별을 경험하면서 같이 자랐던 친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어요. 언니는 아픈 상황임에도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해야 했기에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욕망을 제게 다 쏟아냈어요. 저는 그걸 다 보고 자라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꿈을 위해서 살겠다. 화가가 되어야겠다. 그러려면 내가 모르는 땅에 가야 한다. 맨땅에서 내가 스스로 밟고 일어서야겠다.’ 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건 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의 영향이 컸어요. 제가 좋아하던 인상파 화가들이 전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했기에 로망도 깊었어요.

낯선 땅에서의 첫 유학 생활은 어떠셨나요?
 저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에 웹디자인 분야로 공부를 했어요. 저는 그때 순수미술, 콘셉트 아트를 공부했는데 주로 설치미술이나 입체 작업을 했어요.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국경선 쪽에 있는 도시인데, 당시 한인들이 별로 없었어요. 제가 체구가 좀 작은 데다 말도 잘 못하니까 학생들이 저를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부러 크고 무거운 재료로만 작업했어요. 현지 학생들이 작업한 것보다 서너 배 더 크게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때 인정을 조금 받았고, 학생이었지만 대가들과 유럽 여기저기서 전시도 하고 초청도 받았어요. 저는 학교 다닐 때가 제일 즐거웠던 것 같아요. 배고팠지만 행복했어요.

이희재의 『간판스타』,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 일기』 등 100여 편의 한국 만화를 불어로 번역하셨는데, 그 일을 맡게 된 계기와 작업하시면서 느낀 점이 궁금해요.
 학교를 졸업한 뒤에 파리로 이사를 갔어요. 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포트폴리오를 들고 파
리의 유명 갤러리들을 다 돌아다녔지만 녹록치 않았어요. 힘들게 작업하면서, 먹고 살아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옷 파는 일, 애 보는 일 등 별별 일을 다 하면서 조그마한 원룸에서 살았어요. 그렇게 몇 년 동안 고심하다가 만화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가장 싼 재료로 예술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시 한인 신문에 ‘쁘띠아’라는 제목으로 세 칸짜리 만화를 연재했는데, 제가 이 작품을 제의했던 프랑스 출판사에서 대뜸 한국 만화를 번역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당시 파리에는 한국 만화 번역가들이 없었어요.

작가님께서 처음 국내 만화를 불어로 번역해 소개하시게 된 거예요?
 예. 출판사에서 시험을 봤는데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생계를 위해 만화 번역을 시작했는데, 프랑스인 남편과 같이 작업했어요. 프랑스어는 제 모국어가 아니니 함께했지요. 100여 권 이상 작업했는데 그중에서 괜찮은 작품은 10권 안팎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번역했던 만화 작품들 대부분이 단순 모방이거나 흥미 위주였어요. 만화가가 한 작품을 만들 때, 세상을 보는 철학이 있으면 그게 작품에 나타나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맡은 한국 만화 대부분이 테크닉은 뛰어났지만 내용이 깊이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희재 선생님의 『간판 스타』나 오세영 선생님의 『부자의 그림 일기』는 한국 만화 역사에서 오랫동안 남을 작품이지요. 저는 지금 우리나라에 나오는 좋은 만화는 굉장히 소수라고 생각해요. 적은 수의 훌륭한 작품들이 대다수의 흥행 위주 작품들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라고 봐요. 작가가 살아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변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계속 발표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건 그런 시간성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무조건 ‘4차 산업혁명’ 이야기잖아요. 작품보다는 산업의 측면에서 돈을 얼마나 벌어올 수 있느냐에 치중하다보니 좋은 작가와 작품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게 돼요. 그러니까 작가들도 각자의 색깔을 찾아서 깊이 있게 작업하기 어려워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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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만화 『풀』 이전에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을 통해 단편 만화 「비밀」을 선보이셨는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요?
 1993년 가을, 당시 변영주 감독이 여성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다고 했어요. 영상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했는데, 당시 정확한 정황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고 한동안은 모르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2007년에 전경아 작가가 『위안부 리포트』라는 만화책을 프랑스에서 발간했고, 저는 만화계에서 번역자이자 통역자로 일하고 있었어요. 책 출간 행사에서 통역을 하게 됐는데, 컨퍼런스 현장에서 프랑스 역사학자가 “조선의 여성들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은 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돈을 받은 이후에 본인의 의지로 전쟁터에 갔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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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 가슴에 강하게 남으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그 역사학자의 말에 바로 반박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어요. 그러다가 2012년, 판소리를 배우다가 만나게 된 조정래 감독님께서 저한테 영화 <귀향> 포스터를 그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포스터를 그리기 위해 할머니들 그림도 참고하고 증언집도 읽었어요. 정말 마음이 좋지 않은 채 그림을 그렸는데, 여러 작업 일정 때문에 제가 깊이 있게 작업하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일 년 후, 우리만화연대와 한국만화가협회 쪽에서 위안부와 관련한 만화 작업을 부탁했어요. 저는 이 작업물을 앙굴렘에서도 전시하려고 하는데, 작업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세 달밖에 안 남은 거예요. 그래서 증언집을 찾아 읽었어요. 사연들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다들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집의 딸들이었고, 힘들게 끌려가서 고향으로 돌아가질 못하셨다는 거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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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위안부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셨는데 『풀』을 그리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비밀」 작업이 끝나고 난 뒤 위안부 연구자들과의 만남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상해사범대 중국 ‘위안부’ 문제연구센터 객원 연구원이신 윤명숙 선생님 이야기가 제 머리에 꽂혔어요.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관련 작품들이 대부분 남성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내가 어쩌면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가해자의 시각으로 이 작업을 이야기했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제 자신에게 문제 제기를 하게 된 셈이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 가려졌거나 숨겨진 이야기들을 만화로 그려내고 싶은데, 이미 이슈화된 이야기를 제가 다시 한다면 다른 시각과 다른 이야기가 있어야 가능하리라고 생각했어요. 몇 개월 고민하다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할머니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책을 읽고, 연구자들과 작업했던 작가들을 만나고 답사도 했어요.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오로지 이 작업에만 골몰한 것은 아니에요. 다른 작업을 함께하면서 꾸준히 살펴봤어요.

작품의 주인공인 이옥선 할머니를 처음 뵀을 때의 감회는 어떠셨나요?
 나눔의 집에 갔을 때 할머님들의 건강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으셨어요. 어떤 분은 사진으로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셨고요. 이옥선 할머니께선 공부를 굉장히 하고 싶어 하셨어요. 제가 나눔의 집에 제 만화책인 『꼬깽이』를 두고 왔는데, 그 다음에 가보니 할머니가 눈도 잘 안 보이시면서 방에서 제 책을 읽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할머니인가 보다.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하는 마음에 인연이 닿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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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할머니들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기에 부담이 크셨을 것 같아요.
 사실 좀 두려웠어요. 나눔의 집에 가서 욕도 좀 먹고 그랬어요. 우리는 아픈 이야기를 한 번 들으러 가는 거지만,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상처 끄집어내는 일을 반복하는 거잖아요. 어느 날엔가 할머니 한 분은 역정을 내시면서 “너희는 이야기 한 번 듣고 끝이지만, 우리는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왜 그런 몹쓸 것을 듣고 싶어 하느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저 묵묵히 들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들께 이 책을 보여 드림으로써 절대 다시 상처를 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어요. 그림이나 언어의 표현 등 전반적인 모든 것에 신경을 많이 쓰고 조심했어요. 구체적인 폭력 장면도 거의 그리지 않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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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노래』에 이어 『풀』에서도 ‘수양딸 제도’로 고초를 겪는 여성의 일상이 나오는데, 이처럼 해방 이전의 배경을 자세하게 묘사한 이유가 궁금해요.
 당시 조선 서민들이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는 심정으로 쌀 한되를 받거나, 50원을 받고 딸들을 수양딸로 많이 보냈다고 해요. 『풀』에서도 나오듯이, 미자 언니가 어린 나이에 ‘민며느리(민머리인 채로 장래의 시집에서 데려다가 기르는 여자아이)’ 생활을 하게 돼요. 가난한 하층 계급의 어린 딸들이 취업 사기로 끌려갔든 다른 말에 속아서 끌려갔든 군인들이 이들을 이동시킬 때 강제성이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분명하게 이해해야 해요. 저는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이 ‘누구의 딸들인가’를 이해하며 계급의 문제를 살펴야 하기에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묘사했어요.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있는 사람이 가장 큰 피해를 받는데, 저는 그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보여 주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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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들에게 겁탈당하는 장면을 표현할 때 상당히 고심하셨을 것 같아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는데, 독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검은 컷을 쓰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검은 컷을 세 페이지에 걸쳐 구성했는데, 저는 이 대목에서 상처받은 영혼의 침묵이나 숨소리를 계속 들어요. 한 컷으로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기에 생각한 방법이에요.
 
해방 이후 다시 만난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셨는데, 그 대목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어요.
  국내에서 위안부와 관련해 이야기가 가장 덜 된 부분이 바로 해방 이후 피해자들의 삶이에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 소련이 내려왔고, 할머니들 일부는 소련군에게 다시 성폭력을 당했어요. 할머니들은 그 모진 세월을 겪고 나서 평범한 여성들처럼 결혼할 수 없었고, 생존하기 위해 꿋꿋하게 투쟁하셨어요. 어렵게 가족을 찾아 한국에 돌아와도 외면당하셨어요.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인권을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자기 가족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대부분 피하기 일쑤예요. 가족들이 할머니들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한국 사회의 한계를 보여 주는 대목이지요. 위안부 문제는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같은 피해자라는 점이 중요해요. 할머니들이 그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다시 상처를 받아야 하는 비극이 생겨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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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제목을 ‘풀’로 정하게 된 이유는요?
 보통 여성들을 ‘꽃’으로 많이 표현하잖아요. 일본군들도 당시 위안부들을 꽃으로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다르게 표현하려고 고민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지나가다가 밟히는 게 풀이더라고요. 우리 민초들이 풀인 것처럼요. 그런데 풀은 애초부터 잡초가 아니었어요. 인간들이 자신들의 범위 안에서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이름을 모르기때문에 풀이고요. 전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풀, 거리 어디에나 있는 풀, 우리를 잘 대변하는 것이 풀이 아닌가 싶어서 제목을 ‘풀’로 정했어요. 제목을 정하고 난 뒤 윤명숙 선생님께 어떠냐고 물었더니 김수영 시인의 「풀」을 아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어, 이거 내 마음과 똑같다.’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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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을 다룬 『지슬』,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이야기를 그린 『할아버지와 보낸 하루』 등 작가님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로 아픈 현대사 속 약자들의 삶을 그리셨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현대사 속 아픈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절실하기 때문이에요. 대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어 작품들을 만들게 되는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제 감성을 건드렸기에 작업을 하게 됐어요. 제가 죽기 전에 꼭 이야기해야만 하는,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여기면 저는 작업을 시작해요. 그리고 저 또한 약자이기에,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계속 표현하고 싶어요.

만화 작업을 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만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림 스타일도 테크닉도 아니에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해요. 위안부 문제를 예로 든다면, 제 단편 작품인 「비밀」에서는 사실적이진 않지만 여성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그렸어요. 하지만 『풀』에서는 그런 장면을 그리지 않았어요. 그런 부분들을 한 단계 더 고민하면서 작업했지요. 특정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지 않고 표현한 셈인데,이런 예처럼 만화가라면 무엇을 어떤 측면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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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처음 하신 것이 판소리 공부라고 하셨는데, 작가님에게 있어 판소리가 가지는 각별한 의미가 있나요?
 판소리는 저에게 있어 뿌리예요. 유명한 소리꾼은 아니셨지만 고흥에서 동네잔치가 있을 때마다 소리를 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깊어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는 저의 외부인 서양의 것을 제 안에 담으려고 했기에 실은 한국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요. ‘내가 한국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제게 끊임없이 깃들었고,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컸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한국문화원에서 판소리하는 소리꾼이 와서 소리하는 걸 듣고, 어린 시절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이 판소리를 배우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좋아해서 자주 들어요.

구상 중인 차기작이 있다면요?
 지난 여름에 차기작 콘티를 짜고 취재하기 위해 두 달 동안 프랑스에 가 있었어요. 『아버지의 노래』 후속편 작업을 하기 위해 갔는데, 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급한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제 머리 속에 있는 서랍 하나에 넣어 두고 다른 취재를 하는 중이에요.

어떤 취재를 하고 계시나요?
 지금 제게 가장 절실하게 와 닿은 게 우리나라 장애인에 관한 거예요. 최근에 서울 강서구 지역에서도 장애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관한 갈등 문제가 극심하게 일어났잖아요.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었어요. 물질 만능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니까, 돈이 최고다 보니까, 우리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 편협하고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판소리 모임에서 만난 발달 장애인 친구를 인터뷰 중이에요. 어제도 저녁 늦게까지 인터뷰를 하고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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