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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교사 가을과 운동장, 그리고 ‘무한으로서의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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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0 21:37 조회 5,58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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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가 맡은 청소 구역은 학교 운동장이다. 교문에서 보자면 운동장 오른편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이 있고, 왼편에는 소나무나 은행나무 등이 줄지어 서 있는 석조 스탠드가 있다. 거기까지가 청소 구역이니 꽤 넓은 편이다. 그렇다고 청소 구역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 청소 구역이 퍽 마음에 든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아이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 흙길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꽃밭에 버린 과자 봉지를 주우면서 꽃들과 눈인사를 나눌 수도 있다. 스탠드에 떨어진 은행잎은 멋진 가을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니 매일 쓸 필요는 없다. 그냥 바라보거나 한두 장 주워서 책갈피에 끼워 넣으면 된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일단 청소 종이 치면 기분 좋게 운동장에 나오는 거야. 왜? 청소 시간에 공부 안 하잖아. 물론 공부 대신 청소를 하긴 하지만 우린 청소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운동장을 산책한다고 생각하잔 말이야. 꽃밭 주변이나 운동장을 걷다가 과자 봉지나 쓰레기 같은 것이 눈에 띄면 허리 운동도 할 겸 잠깐 멈추고 줍는 거야. 청소 시간에 선생님처럼 책을 들고 나와도 돼.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청소도 하고. 일거삼득이잖아?”

이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킥킥 웃는다.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낯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웃음 끝에 비치는 조금은 진지해진 표정의 변화를 읽을 수가 있다. 평소 반항기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일수록 그 변화의 정도가 심하다. 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들을 ‘전체’로 만나지 않고 ‘사람끼리 서로 마주하는’ 관계가 되다보면 아이들은 조금씩이나마 변할 수밖에 없다.

마주하는 관계로 대하면 아이들은 변한다
어느 날 시내 출장을 마치고 청소 시간이 조금 넘어서 학교로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운동장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아이는 없었지만 급우들과 대화를 하면서 걷다가 서서 휴지를 줍고, 또 걷다가 서서 휴지를 줍고 하는 광경을 보자 마음이 뭉클했다. 청소 시간마다 짜증을 부려야 겨우 몸을 움직일까 말까한 아이들이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한가롭게 운동장을 거닐며 청소 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던 것이다.
또 어느 날인가는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책을 읽으면서 천천한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걸어오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책에서 눈을 떼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2층 복도 창가에서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아이가 이렇게 소리쳤다.

“선생님, 멋있어요. 선생님, 사랑해요!”
책을 읽기는 싫어해도 책을 읽고 있는 교사의 모습은 좋아 보였을까? 그날 내가 읽고 있던 책은 강신주 님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나에게 한 달에 한 번 문화상품권을 보내주는 고마운 분이 계신다. 인터넷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글을 교사신문에 재수록하는 값으로 주는 일종의 원고료인 셈이다. 책을 두 권 정도는 살 수 있는 금액인데, 그중 한 권은 내가 평소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지인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가 원한 책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었다. 책을 사러 서점에 가보니 같은 저자가 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책도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선물할 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하게 그 책을 접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길게 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내가 교사로서 살아가는 데 위안과 지침이 될 만한 소중한 대목을 만났기 때문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밥숟갈로 이리저리 음식을 뒤적거리고 있는 중학생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들이 공부하는 것에 싫증이 나서 또 게임이나 하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는 부모가 있다고 해보지요. 사실 이런 식으로 자녀를 판단하는 태도가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의 속내를 투명한 유리 속 보듯이 빤히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자식의 마음속이 마치 어두운 열 길 물속과 같다고 느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갑갑함을 느낄 때, 이 순간 부모는 자식을 일종의 ‘무한’처럼 상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체’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내가 타자의 속내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오만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대로 ‘무한’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타자의 속내를 끝내 알 수 없다는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 전체주의의 사고가 왜 위험한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학교에는 아이들을 잘 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교사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교사도 있다. 나는 후자 쪽이다. 이것이 나의 무능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정말 아이들을 잘 모른다. 한데 아이들을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교육 활동에 유익이 될 때도 있다.

가령, 청소 시간에 말을 잘 안 듣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그들을 잘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부정적인 면모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런 생각에 갇혀 있다면, 아이들에게 운동장을 산책하면서 청소 시간을 즐겨보라는 말을 아예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잘 몰랐고, 아이들을 ‘무한’처럼 여겼기에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타자’인 아이들을 ‘무한’처럼 여겨야 하리
윤주(가명)란 아이가 있었다. 키가 작고 얼굴은 동그란, 깜찍하고 생기가 넘치는 아이였다. 공부를 썩 잘한 편은 아니었지만 수업 태도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제 영어선생인 나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보면 윤주의 얼굴은 하얗게 회벽을 칠한 듯했다. 그 짙은 화장이 감추고 있는 피부는 이미 어린 학생의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여린 피부에 화장을 심하게 하다보니 피부에 부작용 현상이 일어났고, 그것을 감추려다보니 피부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윤주는 흡연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주에게는 다른 일면이 있었다. 가끔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아이의 내면에 감추어진 어떤 성숙함이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인가 공책 정리를 하다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기에, “윤주, 선생님 좋아해?” 하고 물었더니 “아니요, 사랑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늙은 선생님을 사랑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더니 아이의 대답이 이랬다.
“사랑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물론 이것은 윤주와 나 사이에 오가는 농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윤주가 나에게 그런 농을 던질 만큼 이미 여성성을 갖춘 예비 어른이라는 사실이다. 윤주가 화장을 하는 것도 그런 식으로 여겨주고 싶었다. 물론 화장은 학생으로서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지나친 화장은 어린 피부를 손상시킬 위험마저 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염려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윤주에게 해준 말이다.

“지금 네가 고등학생이니까 불과 이삼 년만 있으면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화장을 할 나이가돼. 그래서 난 네가 지금 화장을 하는 것을 아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아. 그런데 화장을 하는 이유가 뭐야? 그건 남학생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아닌가? 나는 그것이 못마땅한 거야. 왜 그래야 돼? 네 피부까지 상해가면서 왜 남자들에게 잘 보여야 하냐고? 남자들이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 내가 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처럼.”

이런 대화가 오고간 며칠 뒤였다. 하루는 윤주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교무실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린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그날따라 아이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 담임선생님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큰소리로 야단을 치자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아이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슬픈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것이 윤주의 진짜 모습일까?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저 아이를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들어가자 나는 잠깐 동안 아이의 옆에 반 무릎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이가 미안한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서 전에 보아온 당돌하고 성숙한 표정을 읽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나는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늘은 화장 안 했네?”
“예. 선크림만 조금 발랐어요.”
“왜 그런 거야? 왜 오늘은 화장을 안 한 거야?”
“선생님이 지난번에 말씀하셨잖아요? 남학생들에게 예쁘게 보일 필요 없다고.”
“그래서 선생님 말 듣고 화장 안 한 거야?”
“예. 그리고 피부도 나빠지고요.”

그 말에 내가 기쁨의 웃음을 환히 지어 보이자 윤주의 표정도 차츰 달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윤주는 수업 시간이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문제 학생이 아닌 인간의 눈빛을 가진 아이로.
지금도 나는 윤주를 잘 모른다. 아는 부분도 있지만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다. 레비니스의 말을 빌리자면, 윤주는 내게 ‘무한으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고, 교사인 나에게 이 앎이 소중하다는 것도 여실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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