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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시선으로 고전에게 묻다, 새로운 길로 고전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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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09-07 10:22 조회 21,00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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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다양한 시선으로 고전에게 묻다
새로운 길로 고전이 답하다





많은 이들이 고전을 읽는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갈수록 고전을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고전이란 누구나 제목도 알고 지은이도 알며 ‘심지어’ 대충 줄거리까지 아는데 정작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되는 중이다. 갈수록 ‘일반 독자’가 희귀 종족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고전이란 ‘겁나게 두툼하고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며 어렵기까지 한’ 책이라 여기기 쉽다. 그래서 고전古典에 ‘옛 고’가 붙었을 게다. 그런 고전으로는 고전苦戰하기 딱 좋다. 그러나 고전은 고전高展 즉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너른 시야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보석이다.


어쩌다 보니 책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 고전에 대해 연재할 기회를 얻어 여러 해 읽고 썼다. 그렇게 다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처음에는 판에 박은 고전에서 벗어나 때로는 비틀어서 보는 방식을 다뤘고(『고전, 어떻게 읽을까?』), 다음에는 같은 책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책을 해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 혹은 진화했는지를 나 자신의 경험을 실마리로 풀어냈다(『다시 읽은 고전』). 이제 연재 작업의 마지막 단계를 묶어 세 번째 책으로 펴낸다. 세 번째 단계에서 다루고 싶었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저자나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읽을 수밖에 없는(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독법을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예를 들어 조연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심지어 사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식의 익숙하지 않은 접근법 즉 ‘새로운 물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모든 감각과 상상을 동원하여 새로운 이성과 감각으로 ‘느끼고 상상하는’ 접근법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심정에 나를 감정이입하고 동일시한다. 그것은 훌륭한 공감의 방식이기는 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인공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중심적 메시지의 화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인물들 또한 나름대로 세상의 중심이다. 어느 누구도 들러리나 엑스트라 역으로 살지 않는다. 다만 힘의 중심에서 빗겨나 있을 뿐이다. 『토지』를 읽을 때 주인공 서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건 불가피하다. 그러나 다시 읽을 때는 서희가 아닌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읽어보는 것도 좋다. 하나의 시선, 하나의 해석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그렇고 삶이 그러며 세상이 그렇다. 비단 소설만 그런 건 아니다. 심오한 사상도 나의 이성을 이입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며, 읽은 뒤에는 나의 새로운 해석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방식의 ‘감각 소환 읽기’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갈 과거의 새로운 소화라고 생각한다. 낯설고 불편하지만 일단 해보면 꽤나 재미있고 소득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일단 한 번 읽고 난 다음의 도전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전에서 답을 먼저 얻으려 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고전에 물어보는 것이다. 답은 하나밖에 없지만 질문은 끝이 없다. 답은 다른 이가 내린 거지만 물음은 내가 던진다. 이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다. 하물며 고전에 물음을 던지는 건 더더욱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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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의 새로운 발견처럼
내가 이러한 시도를 생각해낸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에서 비롯했다. ‘혼밥’이 점점 더 일상이 되고 있다. 식당에는 ‘혼밥석’까지 마련되고 있다. 혼밥에 대한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관계가 옅어지고 지갑이 얇아지기 때문이라 여기기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크게 어긋나지 않는 현실 인식인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만 여길 게 아니다. 어차피 겪는, 겪게 될 현실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생산적으로’ 소화할 수도 있다. 혼자 밥을 먹는 게 익숙하지 않다. 남 눈치도 보인다. 그래서 그런 외로움을 달랠 겸 자투리 시간 활용의 방식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검색하며 밥을 먹는다. 감각은 두 갈래로 나뉘어 먹는 일은 그저 연료를 주입하거나 음식을 쑤셔 넣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꾸면 그 ‘서글픔’도 전혀 새로운 생산적 경험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왕 겪는 혼밥을 다른 방식으로 소비해보자. 음식은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가장 기본적 수단이다. 우리가 식사 때 오로지 음식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느껴본 적은 뜻밖에 별로 없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면서 밥에만 모든 감각과 사고를 집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혼자 밥을 먹게 되면 오로지 내 몸과 음식이 1:1로 대면한다. 음식에 대한 생각과 느낌에만 집중해보면 어떨까? 내 입에 들어오는 모든 음식의 식자재에 대해 하나하나 음미하고 감각을 최대한 살려 느껴본다. 그 음식의 모든 과정에 닿아 있는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도 느껴본다. 음식을 통해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의미 있는 경험이다.


그런 생각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응용해보면 흥미로운 일도 생긴다. 예를 들어, 전주에 가면 많은 이들이 ‘비빔밥’을 먹는다. 비빔밥은 모든 식재료들이 한 그릇에 섞였을 뿐 아니라 고추장이나 다른 양념들까지 한데 섞인다. 그래서 각각의 재료에 대해 음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전주의 비빔밥 식당들이 음식을 낼 때 각각의 재료가 조금씩 담긴 작은 그릇을 함께 제공하여 먼저 그 각각의 재료들을 하나씩 음미해보게 하고 그다음 비빔밥을 먹으면서 아까 먹었던 식재료들에 대한 미각과 식감을 하나씩 느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잠들었던 많은 감각들이 살아나게 되는 경험을 할 것이고 그런 경험이 우리의 감각을 더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그건 이미 하나의 멋진 경험이고 그 경험의 확장 과정이다. 또한 그 음식을 접하는 내 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느껴볼 수 있다.


고전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고전은 한 번 읽은 뒤 몇 해 뒤 다시 읽으면서 어떻게 다르게 읽히는지에 따라 나의 변화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꼭 한참 뒤에 읽어야 할 당위는 없다. 곧바로 다시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책을 모두 읽은 뒤 곧바로 다시 읽으면서 각각의 감각을 느끼는 방식이다.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미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오로지 각 감각의 흐름을 느껴본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흔히 주인공의 관점에서 혹은 주제의 관점에서 소비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것들은 잘 느끼지 못한다. 스토리의 전개 혹은 주제의 서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감각의 차원으로 해석해보면 뜻밖에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의 청송대를 대부분 ‘靑松’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聽松’이다. 소나무를 ‘듣는다’는 것은 뜻밖의 생각이다. 소나무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솔밭에 흐르는 바람소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직 시각적으로만 이해하니 ‘푸를 청靑’을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이런 방식은 책을 오로지 시각과 정보의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소비하던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느낌과 생각으로 진화하게 해준다. 사실 지금의 독서는 20세기까지의 독서 소비와는 다르다. 지식과 정보 혹은 ‘시각적’ 이야기의 소비 위주에서 21세기가 요구하는 다양한 감각과 생각의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책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이고 장점이다. 가령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을 때 바다라는 공간에 대해서만 몰두해보자. 바다의 물빛, 하늘과 구름의 색깔, 시간마다 달라지는 햇빛의 느낌 등 모든 시각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미 이야기는 다 안다. 그러니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재생할 게 아니라 읽으면서 놓쳤던 다양한 감각을 직접 느끼고 짚어보는 것 자체가 훌륭한 상상력의 과정이고 공감의 방식이다. 노인의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은 단순히 색채로만 서술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깊게 패인 주름들만 떠올려도 하나의 그림이 된다. 다시 책을 읽으면서 이번에는 청각을 중심으로 읽는다. 그다음에는 또 다른 감각들로. 말로만 콘텐츠의 시대니 어쩌고 할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책 한 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상력과 창의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대상들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어쭙잖은 창의력 책들 100권 읽는 것보다 낫다.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물었을 때
고전은 비로소 내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부인해도 고전의 권위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시공을 초월해서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최고의 권위다. 하물며 체제에 순응하는 교육방식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고전의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기 급급하고 그것을 권력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강해서 감히 묻지 못하거나 그럴 이유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내공이 쌓이면 대들고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당대 관점과 현재의 그것이 같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럴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은 충분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적 자본주의 논리의 맹주처럼 여겨질지 모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당대 기득권층에서 볼 때는 불순한 좌파 지식인의 선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권위와 통념에 대해 대담하게 도전했다. 그것은 그의 질문이다. 당대 보편적 가치와 사상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물음’으로 맞선 것이다. ‘왜?’ ‘어째서’라고 따지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가 많은 책을 읽는 이유 가운에 마지막은 바로 그것을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권위를 부여받은 고전에 질문을 던지는 건 이미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누구나 해답을 찾는다. 그러나 그 실마리는 나의 물음에서 비롯된다. 내가 고전에 물었을 때 고전은 내게 새로운 방식으로 답한다. 고전과 나의 그러한 ‘묻고 답하는 감응’이 일어날 때 고전의 생명이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니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고전은 엄청난 대답을 담고 있다. 다만 묻는 사람에게만 그 대답의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모든 작품을 다 그렇게 읽을 까닭은 없다. 그리고 일일이 그렇게 하는 것은 좀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실험적 방법을 시도하면서 전반부에서는 다른 배역의 눈으로 보는 방식을 택했고 후반부에서는 고전을 전복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흔히 고전은 한 번 읽고 다시 읽지 않을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똑같이 읽는 건 고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거기에 갇혀서, 권위에 눌려서 혹은 그 지식을 지적 권력으로 삼기 위해 추종하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감히 이러한 방식들이 탄탄한 기초와 가능한 변용을 통해 어색한 조합이 아니라 매력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고전 읽기의 도전을 주도한다고 믿는다.


나의 이러한 일종의 실험적 고전 읽기가 분명 낯선 방식이고 이전에 축적된 전례가 흔치 않은 탓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또한 나의 한계와 주관적 혹은 때론 자의적 해석에 빠질 우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줄 것이라 믿는다. 그게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럴 수도 있으며 그런 방식을 통해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여러 해 동안 규칙적으로 고전을 읽고 생각하며 묻고 캐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펴주고는 단 한 차례의 간섭도 없이 묵묵히 응원해준 『기획회의』의 배려가 새삼 고맙다. 한기호 소장의 뚝심과 믿음 덕에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탄탄한 실력의 이기홍 편집자가 다시 튼실하게 길잡이로 매조져 책의 꼴을 갖췄다. 나는 베푼 게 없는데 이런 홍복을 누리니 거듭 고마울 뿐이다. 이 책이 그분들께 제대로 빚 갚음이 될 수 있으면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디어 3부작을 완결하는 뿌듯함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작업은 실상 번거로운 일이다. 여러 고전들을 다시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곧바로 또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시선과 감각 그리고 해석의 실마리를 끄집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끊임없이 묻고 캐는 일 또한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물었을 때 비로소 답을 얻을 수 있다. 고전은 그 물음에 발끈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울림으로 새롭고 다양한 답을 건넨다. 그러니 일단은 그렇게 나아가볼 일이다. 그저 판에 박은 듯한 상투적 이해와 해석을 미뤄두고. 여러분들의 응원과 날카로운 비평을 기대한다. 칼릴 지브란의 명언을 등대 삼아 밤의 항해를 떠날 것이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한 가지 진실을 알아냈다’라고 말하라. Say not, ‘I have found the truth,’ but rather, ‘I have found a truth.’”



김경집




::: YTN 라디오 듣기 나와 대화하는 고전으로의 독서여행 https://youtu.be/w7x6EfoilCg


::: 명로진 TV 보기 고전에서 답을 얻는다? 내가 먼저 묻는다 https://youtu.be/VEEAoUV52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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