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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전 읽기는 왜?]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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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3-16 09:46 조회 7,40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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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인문학자, 『인문학은 밥이다』 저자
 
『삼국유사』 하면, 대부분 정사인 『삼국사기』와 달리 온갖 야사를 모은 이야기책 혹은 수많은 황당한 이야기 묶음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런 편견은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이해했다면 이야기를 찬찬히 다시 읽어 보자.
 
속살을 들춰 보라
1933년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하여 보물 등으로 지정해 그 다음해에 공포했다. 보물1호는 남대문, 보물2호는 동대문(흥인지문), 고적(현재는 사적)1호는 포석정이다. ‘국보’가 없는 것은, 식민지에 무슨 국보가 있을 수 있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고 사적이 아니라 고적인 것은 그저 오래된 흔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식민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사적1호가 포석정이 된 데에는 『삼국유사』가 악용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대부분의 읍성을 무너뜨렸다. 당시의 읍성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지리적 정체성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원형을 그대로 남긴 읍성은 낙안・고창・해미의 읍성 세 개뿐이다. 그곳은 일본인들이 들어가서 살 필요가 별로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경성(당시의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양 도성을 모두 무너뜨렸고 사대문도 허물었다. 남대문이나 동대문도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데, 그 두 문으로 일본의 가토(加藤淸正)와 고니시(小西行長)가 출입했다는 이유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국보1호와 보물1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물론 숭례문과 동대문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 지정의 근거가 조선총독부의 보물 지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포석정은 고적1호였고 지금도 사적1호인가? 우리가 알고 있기로 포석정은 왕과 귀족들이 술 마시고 놀던 유희의 장소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경애왕은 후백제의 견훤이 국토를 유린하고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11월(음력)에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결국 경주가 함락된 뒤 견훤의 강요로 자진(自盡, 스스로 목숨을 끊음)했다. 간악한 일제는 『삼국유사』에서 이 부분만 떼어 내어 임금이 나라가 함락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주연에 빠져 있는 족속이니 무슨 국가를 운영할 자질을 갖춘 민족이냐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으로 분칠해 버렸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결코 그런 엉터리 사관은 성립할 수 없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한 건 9월(당연히 음력이다.)이었고 지금의 영주를 점령하자 신라는 급히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원병이 오기 전인 11월에 수도 경주가 함락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분명히 “11월에 포석정에서 주연을 즐겼다.”라고 쓰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어느 누가 그 엄동에 야외에 나가 주연을 즐겼겠는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억지 주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 토대로 식민사관을 지어냈고, 그래서 고적1호로 정했으며, 지금도 사적1호이다.
 
질문하라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고전을 읽을 때 결코 그무게에 눌려서는 안 된다. 주눅 들지 말라는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쓰였고, 그것을 왜 변조하여 식민사관을 강화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쓰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 썼다.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견씨(견훤)가 침략했을 때는 승냥이 이리와 같더니 왕장군이 오시니 어버이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표기한 것만 봐도 그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애왕은 왜 포석정에 갔을까? 사실 거기에는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문노(文弩)라는 화랑을 모시고 있었다. 문노는 모든 화랑의 모범이 되는 화랑이었다. 그러니 포석사는 성지였고, 경애왕은 문노에게 나라를 지켜달라고 제사를 지내러 포석사에 갔던 것이며, 경주의 도읍 백성들에게 문노를 본받아 신라를 지켜내자는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를 하러 갔던 것이다. 술판을 벌이고 무희들과 희롱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물어야 답을 찾는다. 묻지 않고 글자만 따라가면서 외우기 급급하면, 자칫 텍스트라는 무게 속에 함몰되어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 이와 같은 엉터리 사관을 갖게 된 데에는 『삼국유사』의 탓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왜곡해서 분탕질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역사계의 탓도 있다. 그러나 그걸 아무 의문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게도 무관심과 순응이라는 허물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딱딱한 정사와는 달리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온갖 기이한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는 까닭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때로는 도대체 이성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아서 사실감이 떨어지는 것으로 비추기도 쉽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와 전승의 방식을 추적해 보면 뜻밖에 많은 속살을 찾아낼 수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의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그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여이설화(驢耳說話)’에 따르면 신라시대 희강왕의 손자였지만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화랑 응렴(膺廉)은 헌안왕의 질문에 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사위가 되었고,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여 경문왕이 되었다. 경문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갑자기 그의 귀가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으나 오직 왕의 복두장이(예전에 왕이나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던 복두를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하던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왕이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귀를 덮는 모자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경문왕이 실제로 당나귀 귀를 가졌다기보다는 왕위 계승의 정통 적자가 아니라는 열등감, 즉 정통성에 대한 불안을 상징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연히 왕은 자신의 귀에 대해 발설하면 복두장이를 죽일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도림사라는 절의 대밭 속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임금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라고 소리쳤다. 그 뒤부터는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이것을 싫어하여 대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게 하였으나 그 소리는 여전하였다. 아무리 억눌러도 진실은 끝내 밝혀지는 법이다. 그런데도 듣기 고깝거나 불리하다고 여기는 말을 막으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설친다.
이 이야기는 설화성이 매우 풍부하여 널리 구전되고 있고, 또한 그 분포 지역이 국내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거리가 되어 왔다. 아아르네–톰슨의 ‘미다스 왕과 당나귀 귀(Midas and the Ass’s Ears)’에서는 복두장이 대신 이발사가, 대나무 숲 대신 갈대밭이 나온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곡에 나오는 미다스 왕의 이야기 구조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왕의 손이 닿는 것이 모두 금으로 바뀌는건 그의 욕심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당나귀 귀 이야기는 프랑스, 루마니아, 러시아, 그리스, 아일랜드, 칠레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당나귀 대신 말이나 산양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귀는 치부를 상징하는 것이고 감추려 애쓰는 권력의 작용도 동일하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경문왕의 당나귀 귀 이야기는 그의 정통성 문제일 수도 있고 실정과 비리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겸손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보여 헌안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지만, 집권하자마자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개혁을 내세워 지나친 강압정치를 폈으며, 헌안왕의 첫째 공주와 결혼하였음에도 그녀는 박색이라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모의 둘째 공주를 왕비로 맞는다. 또 그 와중에 간통하여 아들까지 낳고 이를 은폐하고자 그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바로 궁예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러한 경문왕의 허위의식을 당나귀 귀 설화로 표현한 것이다. 경문왕은 진솔하게 소통하고 화합하는 정신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 구조를 잘 읽어 보면 겉보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맥락을 짚어내며 읽어 가는 것이다. 그걸 찾지 못하고 그저 텍스트의 무게감에만 눌려서 혹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만 여겨서 대수롭지 않게 읽으면 그게 보이지 않는다.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
청소년기는 아무것도 완성된 게 없는 시기이다. 그래서 본인은 불안하고 불완전하게 느낀다. 하지만 그 나이는 결코 어떤 것도 완성될 수 없는, 오히려 완성되어서는 안 되는 시기이다. 성장의 시기이고 갈등의 시기이며 수많은 것들과 투쟁하고 이리저리 재며 경험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사춘기 청소년들은 어느 것이 부족하다고 열등감을 느끼거나 그 부족한 것의 빌미를 잡아 놀리곤 한다. 이른바 왕따인 집단 따돌림 현상도 발생한다. 그래서 상처를 쉽게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삼국유사』의 많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 들거나 왜곡하려 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문왕의 당나귀 귀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듯, 자신의 허물과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도 없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난 것도 아니고 모자란 허물을 인정하는 것은 일단 자신의 초라함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보면 그것을 인정하고 고침으로써 더 나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청소년기는 이제 겨우 삶의 본격적인 시작의 시기일 뿐, 결코 완성된 시기가 아니다. 부족한 점도 많고 허물도 많다. 그걸 깨닫고 고치며 개선하는 사람이 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고조선은 없다
『삼국유사』는 ‘고조선’ 편으로 시작한다. 단군신화 이야기도 상세하게 나오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쓰였다. 그 시기는 원나라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렸던 시기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상기시킴으로써 민족적 자부심과 외세에 대한 독립심을 에둘러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없지 않다. 특히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 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핵심이 바로 단군신화에 관한 대목이다.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뿌리의 기록이다. 그것이 설화구조로 되어 있는 까닭에 사실이냐 아니냐 여부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무조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삼국유사』는 정당성의 근거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사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가 없다는 게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없다. 생각해 보라. 누가 나라를 세우면서 ‘낡은, 오래된’이라는 뜻의 ‘고(古)’라는 수식어를 붙이겠는가! 실제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가 조선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였으니 그 고려를 무너뜨린 왕조는 그 정통성의 뿌리를 더 깊게 찾아야 할 뿐 아니라 단순히 고구려만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포함하는, 그 뿌리까지 잇는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택했다. 그런데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의이름이 있었으니 그것과 구별하고 차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서 이미 그 이름이 나왔기에 자연스럽게 차용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과 국가의 뿌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졌다는 민족의 자부심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는 원나라 몽골족과는 달리 유구한 민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 말이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특별히 조심해서 가려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유사』나 일연의 허물이 아니다. 그 점 또한 짚어보며 읽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정사도 아니고 사관이 아닌 승려 일연 혼자 쓴 것이며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 지방의 일원이었다는 제약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물며 북방 계통의 기사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간혹 인용된 사례도 역사적 기록과 어긋나거나 심지어 잘못 전해진 사적을 그대로 수록한 것도 있어서 비판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허물은 그리 크지 않다. 다만 그걸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며 읽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삼국유사』는 풍부한 이야기의 보물창고이다. 이 책에는 많은 민속, 고어휘, 성씨, 지명의 기원, 사상과 신앙, 수많은 일화 등을 금석과 고적에서 찾아내 집대성해 놓았기 때문에 다양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담겨 있다. 거기에는 우리 고대의 정치, 사회, 문화 생활의 원형이 그대로 녹아 있다.
요즘은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의 시대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만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진수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삼국유사』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그것을 꼼꼼히 읽고 잘 다듬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풀어내거나 각색하기만 해도 엄청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단 한 차례 올라 있는 ‘장금’이라는 이름을 보고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여자 요리사의 이름이 실록에 기록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가 바로 한류 드라마의 원조가 된 <장금이>였던 것을 기억해 보면 『삼국유사』가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의 보물창고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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