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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전읽기는 왜?]진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에밀졸라『나는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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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1-23 20:49 조회 7,53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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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인문학자, 『인문학은 밥이다』 저자
 
우리는 흔히 고전이라고 하면 수천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왔거나 엄청난 두께의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고전의 영토에 발을 불이지 못한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고전은 시간이나 부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시대와 역사를 바꾸고 인류와 문명의 진보를 이끈 것이라면 마땅히 고전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 에밀 졸라의 이 글은 그런 점에서 위대한 고전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에 정의를 묻다
1894년 10월 31일 프랑스에서 한 육군 장교가 체포되었다.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고, 기밀을 넘겨 준 나라는 바로 독일이라는 것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에게 치욕적으로 참패했기에 독일은 프랑스의 철천지원수였다. 그런 독일에 군사 기밀을 넘겼으니 체포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3공화국(1870~1940)을 출범시켰고, 모든 대외 정책의 초점은 독일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장교는 유대인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프랑스혁명 정신인 박애, 평등, 자유는 특유의 톨레랑스(관용) 정신을 낳았고, 유대인들에게도 프랑스인과 똑같은 시민권을 누리게 했다. 물론 프랑스에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유대인들은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적국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유대인이었으니 변호의 여지도 없었다.
그 유대인 장교의 이름은 바로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였다. 같은 해 12월 19일 드레퓌스는 군사법정에서 비공개로 재판을 받았고 종신 유배를 선고받았다. 그의 혐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건 오직 독일에 전달했다는 명세서의 필적과 그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것뿐이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재판이었다. 이 사건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못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이었기에 어떠한 동정도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관심과 동정은커녕 시민권까지 부여했는데도 유대인들은 조국을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억압했다. 다음 해에 드레퓌스는 악명 높은 유배지인 프랑스령 기아나로 추방되었다. 그의 가족들만이 그가 무죄라고 확신했고,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위에 달걀 던지기와 같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잊힐 사건이라 여겼다.
그러나 프랑스 육군의 정보국장 피카르 중령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명세서를 작성한 장본인이 바로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알게 되었고, 즉시 참모총장과 차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그 보고는 묵살되고 드레퓌스의 부인이 재판의 절차가 불법이었다며 재심을 요구하자 신임 국방장관은 피카르를 아예 정찰 임무라는 미명으로 다른 곳으로 추방해 버렸다. 피카르는 애써 진실을 밝히려 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친구인 변호사에게 그 사실을 털어 놓았고, 변호사는 다시 상원의 부의장 케스트네르에게 알렸으며 무죄를 확신한 그는 재심을 청구했다.
피카르, 변호사 르블루아, 상원 부의장 케스트네르는 끝내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에스테라지는 기소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는 군부는 필적 전문가들에게 압력을 넣어 그 필적은 에스테라지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사실 이것은 진범 에스테라지가 참모본부와 짜고 만들어낸 계략이었다. 결국 그는 군사법정에서 무죄로 판정되어 석방되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법정에서조차 진실은 외면되었고 왜곡되었다.
왜 프랑스는, 군부는 애써 이 사건을 감추고 희생자의 무고함을 외면했을까?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서 얻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가 실추된다고 믿었고, 좀 더 거창하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도 국가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과연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은 현대에도 자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진실을 고발하는 사람들은 늘 억압되고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고통받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까지 그것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당연하고 정의로운 일이지만, 정의는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준엄하게 묻는, 시대의 사건이었다.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진실의 횃불을 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레퓌스 사건은 그 실체가 완전히 밝혀지기까지 12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사건은 프랑스 전체를 갈등과 반목, 증오와 투쟁으로 이끌었다. 이 사건을 통해 보수와 진보, 인종 차별, 국가의 폭력성, 여론 조작을 일삼은 왜곡된 언론 등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실과 허위의 대결에서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는 위대한 승리를 보여 줬다. 그 승리는 저절로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 시민들은 드레퓌스가 ‘진범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진범이라고’ 확신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뜩이나 미운 유대인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는데, 그가 원수인 독일의 스파이였다는 것은 대놓고 유대인들을 핍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게다가 어설픈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의 망령은 아예 드레퓌스와 유대인들은 한 묶음으로 희생양으로 삼기에 딱 좋았다. 그래서 군중들은 법정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나오는 에스테라지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양심적인 프랑스 시민들은 이 사건에 경악하고 분노했다. 진실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거짓으로 대응하는 정부와 군부에 대해 비판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였다. 그는 유명한 작가였고 명망이 높은 지식인이었으며 예술가였다. 그는 이 사건과 판결에 대해 혐오스러워했고 마침내 <로로르>라는 신문에 이에 대해 기고했다. 그것이 바로 「나는 고발한다」라는 유명한 글이다. 이 글은 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에서 보여 주듯. 시작은 이렇게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곧이어 “가증스러운 드레퓌스 사건이라니, 당신 이름에 대해, 게다가 당신 통치에 대해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먹칠인지요!”라고 하면서 핵심을 찌르고 들어간다. 그는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에, 자신의 의무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조목조목 밝힌다. 그러면서 그 사건의 잘못은 태만함과 아둔함에 기인하다고 단정한다. 그 집단 특유의 종교적 열정과 연대 의식이 강요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즉 어리석음이라는 죄를 짓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에스테라지 사건을 따지면서 3년이나 흘렀음에도, 그리고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깊은 고통과 불안을 느꼈고, 마침내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는데도 에스테라지를 무죄 방면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공스장군, 부아데프르 장군, 비요 장군이 그 명세서의 작성자가 에스테라지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한 것은 에스테라지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초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참모 본부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무죄로 풀어줬다고 조목조목 비판한다. 특히 비요 장군의 경우 깨끗한 채로 장관직에 취임해서 드레퓌스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리고 부아데프르 장군, 공스 장군, 부하 장교 등 참모 본부 전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에밀 졸라는 진실을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거짓과 죄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참모 본부 전체가 유죄가 되지 않는 한 드레퓌스는 무죄가 될 수 없음’을 확언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최종적인 책임자는 결국 대통령이 될 것임을 경고한다.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고, 이 폭압과 거짓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라고 밝히고 있는 셈이다.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입니다.”
에밀 졸라는 자신이 고발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저지른 사회악을 뽑아내지 않으면 정의로운 프랑스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렇게 대담한 공개서한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외친다.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진실과 정의에는 상당한 대가가 요구된다
에밀 졸라는 이미 당시에 유명한 작가였고 많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쓰는 것에만 안주하지 않았고 진실을 증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말하지 않으려는 진실을 외쳤다. 그런 그에게 돌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3년 뒤 사건의 진상에 대해 작가 라자르에게서 들으면서 진실과 정의를 살려 내야 한다고 확신하고 행동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존경받던 대작가는 이 유명한 격문으로 기소되었고 법정 최고형인 징역 1년과 벌금 3,000프랑을 선고받았으며 그에게 수여되었던 훈장도 회수할 것을 결정됐다. 결국 그는 선고 당일 저녁 런던으로 원치 않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에게 돌아간 것은 배신자, 매국노를 옹호한 파렴치한이라는 비난이었다. 그러나 그가 높이 치올린 횃불은 마침내 사건의 진실을 밝히도록 만들었다.
에밀 졸라는 심지어 자신의 재판에서도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맹세하건대, 드레퓌스는 무죄입니다. 그의 무죄에 제 인생을 걸고, 제 명예를 걸겠습니다. (중략) 그리고 제가 이룬 모든 것, 제가 획득한 명성, 프랑스 문학의 확산에 기여한 제 작품들에 기대어 저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단언합니다. 만일 드레퓌스의 무죄가 아니라면, 제 작품이 사라져도, 제가 이룬 그 모든 것이 무너져도 좋습니다! 그는 무죄입니다.”
 
이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확신하는 정의감인가! 그가 드레퓌스의 무죄를 통해 얻을 이익이 있었을까?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 그런 점에서 에밀 졸라의 용기는 위대한 것이다.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1899년에 개최된 재심에서는 이미 에스테라지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다시 유죄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사면했다. 그것은 군부와 드레퓌스를 다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사면이란 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망명에서 돌아온 에밀 졸라는 이 우스꽝스러운 결정에 대해 다시 맹비난했다. 그는 드레퓌스의 명예회복, 더 나아가 프랑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지루한 공방 끝에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가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진실과 정의는 그런 희생 속에서 꾸준히 자라왔다.
드레퓌스 사건은 양심에 따른 지식인의 사회 참여, 국가주의에 대한 맹신으로부터의 결별, 인권에 대한각성을 확립시킨 시대적 사건이었다. 에밀 졸라가 죽었을 때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그를 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참여를 통해 조국을 명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합니다. 걸출한 삶과 뜨거운 가슴이 그에게 가장 위대한 운명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에밀 졸라의 위대한 지성과 양심이 청소년들에게는 자칫 추상적이거나 거창한 것으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거짓도 자꾸 보아 익숙해지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건 자신의 양심의 가책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불의도 여러 차례 반복되거나, 그것을 통해 자신이 이익을 보게 되면 정당한 일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한다. 거짓과 불의의 문제는 비단 어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청소년 때부터 그렇게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거짓과 불의의 편에 서서 얄팍한 이익을 취하거나, 후환이 두려워 외면하는 것은 결국 악을 키우는 방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같은 야만적인 일은 그렇게 일어난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망가뜨리게 되고, 사회로 나아가서는 더 큰 악의 세력과 손잡게 되기 쉽다.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말하고 행동한 것처럼 거짓과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불의의 억압에 당당히 저항하는 도덕성을 키워야 한다. 이런 면에서 에밀 졸라의 짧고도 단호하며 당당한 『나는 고발한다』는 이미 인류의 위대한 교훈적 유산이 되었고, 고전의 반열에 올리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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