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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미래를 가르친다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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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1-23 20:32 조회 7,27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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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산 홍천 매산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미래 이후』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지음|강서진 옮김l 난장|2013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지음|장경덕 옮김|글항아리l2014
 
1.
바람이 불면 가을이 갑니다. 제게 가을은 바람의 원시(原始)가 아니라 결말이기에 춥고 컴컴합니다. 낙엽이 누적되고 볏짚이 끊겨나갈 때, 비로소 가을을 봅니다. 작별하는 서먹함으로, 그 싸늘한 한기가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것이 가을이기에, 가을은 증발 직전의 찰나로만 겨우겨우 기억 속에 자리합니다. 이별이고 회한입니다. 그리하여 가을을 느낄 때면 지참(遲參)한 후회 때문에 삐걱대곤 합니다. 초록이 주홍으로 변모한 아름다운 몰락을 탐지하지 못한 무딘 감수에 대한 후회이기도 하고, 자연의 순리를 놓치며 사는 분주한 삶을 반성하는 통증이기도 합니다. 볕에 대한 숭배와 상승이 봄과 여름이고, 그에 대한 추락과 파멸이 가을과 겨울이라면, 상승하는 것들을 소원하고 추락하는 것들은 외면하려는 추루한 습성이, 가을을 감각하는 게으름과 반드시 관계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매해 반복되는 심각함은 묵사(黙思)해야 할 사태라 봐도 무방합니다.
비단 가을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후회는 정확한 때를 놓치는 게으름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때 해야 탈이 없는 일들이 있고, 제때 느끼지 못하면 지나치는 아름다운 것들이 상당합니다.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그 적절한 시간을 놓치고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고, 생에 대한 나태한 창피라 해도 좋겠습니다. 말인즉슨, 오늘은 오늘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제대로 살기 위해선 몸과 정신은 매번 시간의 흐름에 개통(開通)돼야 합니다. 내일을 예측하지 않는 오늘은 생동하는 오늘이 아닐 뿐더러 후회 없는 시간이기 어렵습니다. 미래 없는 현재는 건조하며, 내일 없는 오늘은 누추합니다. 이 연속성에서 우리는 시간의 마디를 포착하고 삶을 풍요롭게 느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고 미래는 현재를 재단합니다. 역사(과거)가 현재를 판단하는 준거로 작용한다면 전망(미래)은 현재를 개혁하는 신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현재가 바뀌면 과거가 바뀌듯, 미래를 바꾸면 현재도 바뀝니다. 시간에대한 재규정이 오늘을 다르게 변치하기도 하고 진전시키기도 하는 것이지요. 과거에 대한 감각과 미래에 대한 감각은 상통함은 물론이고, 서로 의지합니다. 과거의 관찰은 미래의 관측이고, 과거사 해결은 미래사 안배(按排)라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이를 명민하게 재단하는 숙고는 탐구의 기본 자세이며, 지식을 다루고 가르치는 자들의 기초 윤리라 볼 수 있겠습니다.
시간의 마디에 무색하고, 삶의 무늬에 무력한 주체는 가르칠 자격이 연약하다는 진단은, 같은 의미에서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간혹 무력한 주체는 무감한 주체이기도 하거니와, 무감은 무통이고, 이것이 쾌락이라는 난삽한 욕망주의(소비주의) 체제에 편승될 우려 또한 없지 않기에, 중대한 문제로 받아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이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세와 속이 늘 나쁘진 않겠지만, 세와 속만으로 가르침의 준거를 설립한다는 것은 희망과 이상을 틀로 삼는 교육의 본래 목적과 상응하지 않음은 물론, 교육을 세속의 짝퉁으로 만드는 데 이용당하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시간 감각은 그 자체로 교사 수양 덕목입니다.
가을의 적기를 놓친다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 스산한 후회겠지만, 그것은 후회 이전에 삶에 대한 치열함의 방점을 본질적인 것에 두지 못하고, 반복된 일상의 굴레에 찍는다는 점에서 존재적 나태함이고, 나쁜 것이며, 심히 수정돼야 할 태도라고까지 비약 가능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시간에 대한 감수성’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육은 타이밍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비애를 적기에 감지하지 못할 때 작은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확장되고 파멸되는 것들은 분명 많습니다. 한 명의 식중독을 알아채지 못해 전교생이 배앓이를 감내해야 할 경우도 있고, 저학년 때 익히지 못한 한글 맞춤법이 인생 전반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더욱이 폭력 문제는 적기 조처가 문제해결의 단초가 되곤 합니다. 세월호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선원들의 나태만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무능과 무력을 드러낸 사태이듯, 시간에 대한 무딘 감각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는 것이지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적절한 시기에 보호하지 못해 파국으로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의 눈매를 무력하게 방치하여 자살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확하고, 적절하고, 알맞은 시간 감각은 정확하고, 적절하고, 알맞은 교육 해법을 만들어 냅니다. 부모의 학대를 적시에 포착한 교사가 있었다면, 아이의 존재는 파국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성폭력을 당한 비애의 눈매를 누군가가 보아 주었다면, 아이가 생을 끊는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 숱한 문제는 이 시간에 대한 감각이며,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고, 시간을 다루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교육적 파국을 막는 방패고, 교육이 백년의 큰 꿈을 꾸는 행위라는 진부한 언표가 타당성을 찾는 자리까지 확장 가능합니다.
 
2
시간 감각은 현실을 심도 있게 밀어붙이는 힘입니다. 현실을 충실로 복무하려면 과거는 물론 미래에게도 그 힘을 할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내일의 어제고, 어제의 내일입니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감각은 교육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중심이기에 막중합니다. 미래가 없다면 교육도 없겠지요. 미래는 단순한 내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미래시간 감각은 현실을 심도 있게 밀어붙이는 힘입니다. 현실을 충실로 복무하려면 과거는 물론 미래에게도 그 힘을 할당해야 합니다. 오늘은 내일의 어제고, 어제의 내일입니다. 특히 교육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감각은 교육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중심이기에 막중합니다. 미래가 없다면 교육도 없겠지요. 미래는 단순한 내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미래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래는 시간의 흐름, 즉 오늘이 내일이 되는 시간의 이행에 불과한것이 아니다. 미래는 기다림과 기대의 조건이자, 몸과 정신의 성향을 미리 결정짓는 조건이기도 하다.◆1
 
몸과 정신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에 의하여 결정되고, 미래를 느끼는 감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컨대 1909년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 이후, 20세기 사람들은 그의 선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담하고, 위험하고, 거칠게 세계를 개척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뜨거웠으며, 정신은 강력했습니다. 「미래주의 선언」은 다가올 20세기가 속도와 성장과 풍요로움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라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결과는 예견과 일치했습니다. 자본주의와 근대정신은 세계를 팽창시켰고, 기근과 가난을 극복시키기도 했습니다. 미래 예찬이 사람들을 역동적으로 창조해 냈습니다. 확신은 단단했고 사람들은 나날이 풍족해졌고, 나날이 바빠졌으며, 지구는 나날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미래주의는 속도와 혁명, 심지어 전쟁까지 찬양했습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동조하기도 하고, 기술과 속도에 대한 찬양은 인간을 인간성 위에 위치시키는 반란까지 허락했습니다. 「미래주의 선언」 제 11조를 살펴봅니다.

우리는 노동, 쾌락, 반란으로 격앙된 거대한 군중에 대해 노래할것이다. 현대의 대도시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의 다성악, 혁명의 다채로운 물결에 대해 노래할 것이다. 강렬한 전기 달빛 아래 야밤의 조선소와 정비소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듯 뿜어져 나오는 백열, 연기를 내뿜는 뱀들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철도역, 공장 굴뚝에서 구불구불 피어오르는 연기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공장, 햇빛을 받아 마성을 내뿜는 칼처럼 반짝이는 강들을 운동선수인 양 껑충 건너뛰고 있는 다리, 수평선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는 모험심 가득한 증기선, 파이프로 고삐를 채운
 거대한 강철의 말처럼 가슴을 활짝 편 채 철로 위를 박차고 나아가는 기관차, 깃발처럼 바람을 맞아 펄럭이며 열광하는 군중처럼 박수갈채 소리를 내는 프로펠러를 단 비행기들의 활공 등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노래할 것이다.◆2

「미래주의 선언」은 성공한 실험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질주했고, 획득했으며, 소비했습니다. 질주는 지속됐습니다. 특히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발표한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를 견제하는 공산주의의 미래까지 패배시킨 후, 미래 예찬을 무한 질주 노선에 단독으로 배치시켰습니다. 역사는 자유주의의 변증법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낙관은 인류의 무한한 성공과 성장에 대한 낙천이기도 했습니다. 나날이 경쟁은 합리화되고 치열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무한 경쟁이 역사상 유래 없는 풍요로움을 영속시키는 동기라 믿었습니다. 이를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신자유주의는 공산권의 몰락 이후 급속하게 자라납니다. MB정부의 747전략 또한 신자유주의 정신을 모방한 한국판 신자유주의 선언이고, 한국판 「미래주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년 7%성장, 국민소득 4만 불 시대, 7대 강국”이란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었습니다. 환상은 매력적이었고 MB정권은 우리들의 미래를 지배했습니다. 전망은 오판이었고, 누설이었으며, 그 허황함을 믿은 우리는 민주주의 퇴보와 경제적 망실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우린 MB정부의 가당치 않은 전망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더 이상 믿지는 않습니다만, 아직 미래가 성장하리라는 믿음은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내일을 보기보다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환상에 기대 살고 있고, 그 환상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미래는 어둡습니다. 예리하게 바라볼수록 우극(尤極)이 침침합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되는 이유는 목하(目下), 이 어둠 때문입니다. 그는 『21세기 자본』에서 도래할 미래는 지금까지 미래가 아니며, 불평등 사회는 완성되고 있다고 규소(叫騷)합니다. 자본주의의 성장이 끝났다고 합니다. 밝은 희망은 재귀할 수 없는 과거사가 되었다 합니다. 피케티의 주장은 명료합니다. 돈 있는 자(자본가)의 수익률(자본수익률)은 연간 5%로 일정한데 반해, 돈 없는 자(노동자)의 임금 상승률과 관계된 경제 성장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분석이지요. 경제 침체는 일시적 현상이 아닙니다. 더 이상의 성장은 없으며, 자본주의 팽창은 끝났습니다. 이로인해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시스템은 날로 퇴행해 가고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박애’는 ‘강박, 불평등, 이기’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가치는 추락하고 사회는 혼란합니다. 미래가 차차 ‘상속사회’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상속세, 법인세 인하와 부자감세는 자유라는 구호로 허락되고, 각종 간접세 인상은 계층을 계급화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지요. 18세기 중세 신분사회의 경제적 질서와 지금이 유사하다는 실증적 분석이 『21세기자본』 안에 폭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세상은 동화 같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부는 분배되지 않으며 계층 간의 간극은 지금보다 커질 것입니다. 밝은 미래는 없습니다.
20세기 100년 동안 노동자의 피와 살로 엮어 낸 한 줌의 권리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습니다. 노동시간은 연장되고, 계약직 고용은 늘어나고, 교육은 인플레이션을 넘어 공황 상태로까지 치닫고 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소유권의 발전과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향후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3라는 피케티의 주장은, 자본주의 성장 퇴보와 함께 민주주의 또한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률은 노동자의 삶을 윤택하게 했던 조건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또한 그는 윤택한 삶을 허락받았던 시기가 끝장난 후, 우리는 지금까지 가졌던 미래에 대한 억견을 반드시 수정하고,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바삐 구안해 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계적 세금 비율을 통합하고, 전 지구적으로 부의 분배를 통제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세계 통합 정부가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이란 말조차도 부끄러운 비현실입니다. 환경파괴 규제도 통합하지 못하는 마당에 세제통합의 합의를 이끌어 내고 전 지구민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은, 히틀러보다 더 극악한 독재자가 탄생해야 가능할 만큼 가당치 않은 대안입니다. 그의 말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20세기 벽두가 성공에 대한 예찬으로 시작되었다면, 21세기 미래는 좌절에 관한 진단으로 무성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리고 비극입니다. 불안이 삶을 지배하면, 존재는 비겁해지고 사회는 정의를 잃어버립니다. 불안에 패배한 주체는 빈곤해집니다. 우린 분명 나빠지고 있습니다.
 혼돈입니다. 가르치는 자에게나 배우는 자에게나 이 혼돈은 돌파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대안이 없어 보입니다. “혼돈은 기호와 감정의 흐름이 너무 빨리 순환해서 우리의 정신이 작업을 행할 수 없는 환경”◆4입니다. 미래에 대한 감각이 혼돈스러운 것은, 미래를 지배하는 기호들이 우리가 포착하기도 전에, 이미 변신과 확장을 무한한 속도로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기호의 진위를 판단하기 전에 이미 기호는 다른 기호로 변이하고, 분주한 오늘은 내일의 전망을 진단할 수 없도록 빠르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내일을 지배할 독특한 리듬을 창조할 겨를이 없습니다. 때문에 가르치는자들은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배우는 자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단지 오늘의 불안을 배출할 통로를 바삐 찾는 중이고, 그 통로가 안전하다면 창조니, 혁신이니, 새로운 삶이니 할 것 없이 순종하고 또 복종할 자세를 교육 받고 있습니다. 스펙을 쌓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직 남은 몇 장의 안정적 직업군을 차지해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모두들 느끼고 있습니다. 발전은 멈췄습니다. 질주도 끝났습니다. 민주주의도 퇴보하고 있습니다. 비단 한반도의 상황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다가올 시간을 확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극은 도래하고 있습니다.
 
4
저항하고, 행동하고, 투쟁해도 대안이 묘연해 보입니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행동주의적 투쟁 방식은 더 나은 미래를 조직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와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주장은 레닌이나 마오적 행동주의 혁파노선을 재귀하는 형식으론,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까지 합니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인지노동자는 혁명의 중추가 될 수 없으며, 단결을 끌어낼 명분도 불투명하다는 진단입니다. 21세기는 혁명 동력 또한 작습니다. “폭력으로 싸우는 힘은 오늘날 자기파괴적이거나 쓸모가 없”◆5습니다. ‘비포’는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오직 자살만이 효과적이었음이 판명”◆6되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 피케티의 주장도 같습니다. 피케티는 심지어 프랑스의 좌파 정권이 정치에 주도권을쥘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세계적으로 국가주도적 시스템이 프랑스 성장을 유지하는 힘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합니다. 진보와 좌익의 집권으로 미래가 구출될 것이라는 확신은 환상입니다. 정치가 생활을 바꾸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경제가 정치를 눌렀고, 재기 불가능한 지점까지 밀고 갔으며, 정치적 행동으론 다가올 미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가을을 흘려보내는 후회처럼, 도래할 미래를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지 쓸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절망적 순간에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희망’보다 ‘욕망’이란 말로 간간이 허무를 파괴하려 합니다. “에너지는 쇠락하고 있지만 욕망을 구해야 한다.”◆7라고 말이지요. 욕망을 구한다는 의미는 에너지(역동)의 미래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미래에 무엇인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항변이지요. 절망의 미래를 똑바로 볼 수 있으려면, 패배의식에 젖어 회의주의에 빠지기보다, 내 삶 혹은 내 주변의 삶을 바꾸려는 미미한 시도라도 삭지 않고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내 삶의 비루함과 내 미래의 절망을 정치꾼들에게 전가하기보다, 나 자신부터 이 절망적 진단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내려는 적극성을 살려야 합니다.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고, 삶의 풍요로움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각체계를 바꾸려는 그런 욕망 말이지요. 시간을 세밀하게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재단하며, 충실하게 살아내는 그런 주체적 욕망 말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유럽 사회가 탈성장 과정을 의식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조건들, 서구 사회가 5백 년에 걸친 식민 지배 동안 축적해 온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한 조건들을 창조해야”◆8 합니다. 나부터 특권을 버리고 이 빚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부채의식으로 내일의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양보해야 합니다. 미덕과 관용의 양보만이 아니라 이타적 개인을 창안해 낼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해야 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유일한 답안이기도 하거니와, 교육만이 추동할 수 있는 답안이기도 합니다.
대안은 정치도 경제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교육이, 그리고 교육만이 진정으로, 시간의 감각에 촉을 세우고 미래를 감당해야 할 우리 아이들을 이타적으로 키워낼 수 있습니다. 교육만이 미래의 형식을 구안할 수 있는 희망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라는 절실함으로 말이지요. 미래를 성장으로 보는 그 낡은 관념을 버리고, 우리가 파괴하고 망쳐버린 시간의 부채를 갚아야 합니다. 회한이긴 해도, 아직 우린 지나가는 가을이라도 느낄 시간이 있습니다만, 다가올 아이들에겐 그 시간조차도 사치가 될 수 있습니다. 이타적 아이로 키우려는 교육적 욕망, 그것이 똑바로 미래를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라고 감히 확신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후회할 시간도, 반성할 감각도, 시간을 고즈넉이 바라볼 그 아름다운 시간도 오지 않을 테니까요. 가을이 오는 소리는 몰라도 가을이 가는 소리만을 들려줘야 하니까요.
 
◆1 『미래 이후』. 10쪽
◆2 같은 책. 39쪽
◆3 『21세기 자본』. 237쪽
◆4 『미래 이후』. 247쪽
◆5 같은 책. 227쪽.
◆6 상동
◆7 상동
◆8 같은 책.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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