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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읽고, 쓰고, 토론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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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2-25 13:25 조회 8,21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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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 숭례문학당 학사
 
“눈 화장을 꽤 많이 하셨네요! 히히히”
병수와의 첫 만남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초등 5학년 남자아이에게 들은 첫마디가 눈 화장 지적이라니. 졸지에 난 ‘친절한 민영 씨’가 되어버렸다. 금자 씨처럼 “너무 친절해 보일까봐”라고 응수할 걸. 머릿속이 하얘진 난 그저 멍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숭례문학당의 책 읽고 글 쓰고, 토론하는 아이들의 모임인 ‘책통자冊通者 아이들’에서 만난 병수는 말은 청산유수, 글은 횡설수설, 읽기는 종횡무진인 쾌남이었다. 당시, 병수의 꿈은 전국의 5, 6학년 남자아이들이 모두 그렇듯 축구선수였다. 에너지가 우주 끝까지 뻗치는 심신이 건강한 아이였다. 그런 병수에게 가만히 앉아 읽고, 쓰는 일은 가히 지옥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를 가장 걱정한 이는 병수의 어머니였다. 열혈 독서광인 자신과 달리 책이라면 기겁하는 아이를 보며, 여러 번 가슴을 쳤다는 고백은 절절했다. “병수가 책만 좋아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병수는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비난하기도 했다. “엄마가 책 읽는 게 싫어요, 책만 보고 날 안아주지도 않아요!” 책을 경쟁 상대로 보고 질투를 느끼는 것 같았다. 리더십도 뛰어나고, 학교 성적도 상위권인 아이였지만 집중력이 부족하고 산만했다. 맞춤법 띄어쓰기를 자주 틀리곤 했는데 ‘제미’를 ‘재미’로 바꾸는 데 몇 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런 병수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독서토론이었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읽는 것은 지루하지만, 글쓰기는 싫지만, 할 말 다 해도 되는 독서토론은 재미있었나 보다. 다양한 학교에서 온, 여러 연령층의 아이들과 토론할 때 병수는 늘 웃음을 주는 키맨 역할을 했다. 한번은 『구멍에 빠진 아이』라는 소설에 대해 토론했는데 “소설 속 마르코처럼 구멍에 빠진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만의 방책을 발표하느라 바빴다. 그런 중에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병수에게 “어떻게 하고 싶어요?”라고 물었더니 그제야 진지하게 답했다. “저는 그냥 구멍에서 죽을래요. 잔소리 많은 집보단 나을 거 같은데요.” 순간,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맞아. 나도 그럴래.” “그게 낫겠다.” 이렇게 수군거리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그만큼, 병수는 솔직한 아이였다. 엄마한테, 아빠한테 알려질까 봐 조심했던 속내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정답 없는 독서토론, 신나게 발표해 봐!
이런 발표가 가능해진 건 “독서토론엔 정답이 없다!”는 ‘책통자 아이들’의 철학 때문이다. 첫 시간엔 엄마아빠 손에 끌려 온 아이들이 몇 년간 숭례문학당에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교사는 수업을 시작하며 “독서토론에는 정답이 있을까요? 없을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아이들은 눈치를 보다가 이내 “없어요.”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 교사는 신나게 호응한다. “그렇죠! 정답이 없는 토론이죠! 여러분의 모든 생각이 옳고, 좋은 거예요. 무엇이든 이야기해요!” 그 다음 약속조항을 정한다. 바로, 비밀유지계약. “여기서 토론한 내용은 저도 여러분도 나가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해요.”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소심한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데도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규율적인 환경에 놓인 아이들은 표현력이 금세 좋아지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인 민채도 그런 아이였다. 학교 성적은 1, 2등을 다툴 정도로 뛰어났고, 글도 고등학생 수준으로 잘 썼지만 발표시간만 되면 꿀 먹은 벙어리였다. 심지어 낭독을 할 때도 귀가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시간이 걸렸다. 이런 경우, 아이 부모의 직업과 가치관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민채의 부모님은 공무원이었는데, 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듯 보였다. 할머니까지 3대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민채가 권유받아온 건 자기생각이 아닌 규율과 예의였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민채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싫어할 것같아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 민채에게 ‘자기생각’을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다른 아이들이 책에 대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 민채에게 위안을 주는 건 바로 글쓰기였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면에 쌓인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는 일종의 놀이였다.
 
경쟁 대신 공존 배우는 아이들
책벌레 민채에게 소통의 통로는 말이 아닌 글이었다. ‘책통자 아이들’을 통해 아이들은 이렇게 각자의 말과 글로 뛰어놀았다. 천사의 눈망울을 가진 지영이도 잊지 못할 아이다. “어휘력이 너무 부족해 걱정이에요.” 지영이 어머니의 고민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어공부에 매진했던 지영이는 우리말 표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알고 보니, 책과 친해 본 경험이 적었다. 지영이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책을 같이 읽어 봤다. 상황은 심각했다. 또래 초등 5학년 어휘력에 비해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다. 특정 명사나 개념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는 어휘의 뜻도 잘 모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말도 짧을 수밖에.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데도 돌아오는 건 단답뿐이었다. “재미있어요.” “어려워요.” “지루해요.” 세 표현 말고는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한 번은 다른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 “야해요.” 라고 한 말이었다. 주인공 홀든이 가출 후 방황하는 과정에서 여러 여자를 만나는데, 그걸 보고 야하다고 한 것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박장대소했지만,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음에도 표현하지 못하니 아이도 무척 답답했으리라.
지영이에게 초등 2, 3학년이 읽는 동화나 그림책부터 읽기를 권했다. 그것도 엄마와 함께. 다소 순응적인 지영이는 엄마와 책을 읽으며 조금씩 변해갔다. 수준을 조절하며 책을 고르고 독후감 쓰기를 봐주니 표현력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늘 1분 동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연습시켰고, 다른 친구들의 발표에 귀 기울이게 했다. 긍정적인 성격의 지영이는 친구들과 토론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자연스레 지영이의 말은 길어지고 풍성해졌다. 지영이와 공부한 3년간, 나는 누구나 책만 좋아한다면 시간만 걸릴 뿐 글과 말은 나아지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병수처럼 책을 극도로 싫어하는 경우인데, 이럴 땐 부모와 교사, 아이가 3자교육 체제를 이뤄가야 한다. 아이, 부모, 교사의 입장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되도록 자주 갖고 소통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가 싫어하는 게 책인지, 부모인지, 공부인지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부모와의 유대가 원만하지 않아 부모가 읽으라고 한 책까지 싫어하게 된 경우라면 교사의 역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병수는 중2가 된 지금까지 책을 읽고 쓰고 토론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책을 그리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지만, 어릴 때처럼 혐오하진 않는다. 글쓰기도 제법 틀을 갖춰가고 있다. 아이도 어른도 저마다 걸리는 시간은 다르다. 누군가는 3개월이 걸리더라도, 나는 3년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그 시간을, 적어도 아이들에겐 허락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독서교육이라면 더욱 그렇다.
독서토론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가장 큰 가치 또한 자기관찰이다. 처음엔 낯설어하다가도, 다른 아이들과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다 보면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배운다. 조금만 다르거나 불편해도 짜증을 내던 아이들이 조금씩 참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모두 내 마음 같지는 않구나.’ ‘모두 나와 같은 상황은 아닐 수도 있겠다.’하는 상대화를 경험한다. 이것이 독서토론의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 이 글은 『이젠, 함께 읽기다』(북바이북)에 실린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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