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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열정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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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2-25 12:41 조회 7,4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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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산 홍천 매산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알랭 바디우 지음│박정태 옮김│이학사ㅣ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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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독재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독재가 그 난폭한 자국을 세탁하지 못했던 시절 대학에 다녔습니다. 그곳에는 민주주의를 비방하는 누추한 구호들이 여전했고, 때론 의식주 문제까지 침범하곤 했지요. 그중 잊기 어려운 기억 하나는 학과 티셔츠랍니다. 동질과 균질의 밧줄로 학우들을 꾹꾹 묶으려 했던 제복이었지요. 심장 편에 ‘열정초등’이란 낱말도 눌러 박았답니다. 초등교육학과에 다녔던 저는 교육은 시나브로 열정의 산물이며, 열정만이 그곳을 점령할 수 있다는 전투적 수사라는 사실을 주입당하고, 익대(翊戴)하였습니다. 그 촌스러운 학과 티셔츠를 입고 “열정초등”이란 구호를 연발하며, 개성을 몰아냈던 당시의 치욕은 열정적 삶을 충분히 비관토록 만들었지요. 티셔츠를 함께 입은 우린 남이 아니었기에 다를 수 없었답니다.
타인에게 닿지 않는 사랑이 파멸과 비극의 단골 소재이듯, 타자를 향하지 못한 열정 또한 아프고 병들 수 있답니다. 역사에서 열정이 특정집단을 위한 도구로 강요받았을 때, 국가는 자주 파국으로 치달았고, 그 속에 사람들은 가엾게 죽어 가야 했습니다. 북한의 남침이나, 우리의 매카시즘(좌익 탄압) 같은 것들은 병든 열정의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그 비창(悲愴)은 개성(주체)을 파괴하고, 조직 속에 개인을 누추하게 추락시키지요. 이것을 ‘인간 독재 시대의 열정’이라 불러 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의 열정은 성공 조건으로 설득되고 있답니다. 열정적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증진하며, 승리하라고 사주(使嗾)하네요. 자신을 불태우라 하고 매진하라 하며, 보답은 도래한다고 선전하지요. 이 시대의 열정은 성공과 승리의 바탕이며, 돈과 명예의 기초 체력이랍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종교체제(발터 벤야민)라면, 이 시대의 열정은 그 종교를 버티게 하는 구조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것을 ‘자본독재 시대의 열정’이라 불러 봅니다.
하지만 드물기는 해도 사회의 진척을 벼리 잡고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기에, 열정에 대한 다른 개념 또한 사유할 수 있겠지요. 열정을 실존의 근간으로 다듬고, 사회적 도약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이들도 아직 버티고 사네요. 얼마 전 방문한 프란시스코 교황은 후자의 표본이라고 저는 읽었답니다. 그분은 열정에 대한 권태를 일갈하기에 매력적이었네요. 언론에 회자되고 팬클럽까지 조성된다는 소식 또한 기쁩니다. 교황의 열정이야말로 진짜 열정이며, 이것을 저는 ‘사랑의 열정’이라 불러 봅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말씀이 가슴을 후볐네요. 무교를 신앙하는 사람이지만, 위대한 존재 앞에선 편견이 깨지는 경험도 훌륭한 배움이지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삶을 발코니에서 관망하지 마세요.”
 
직접적인 체험과,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라는 말씀이네요. 관망은 삶에 대한 여유나 관용이 아니라 비겁이고 무능이지요. 현장 없는 삶이란 평화가 아니랍니다. 종종 관망은 나쁜 편들이 이용하는 어용 논리가 되기까지 하니 말이지요. 스마트폰으로 다는 댓글로는 세계가 바뀌지 않겠지요. 교황께서 세월호 유족을 별나게 아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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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관망은 전염병처럼 감염되고 있지요. 나서지 않음을 탓하는 어른도 드뭅니다. ‘악에 맞선 행동’과, ‘부조리에 대한 거역’은 소수들의 싸움으로 추락하고 있네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란 악의 편”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노벨상에 빛나는 과거 우리 대통령이었다는 역사는 자랑스럽지만, 그 선언을 지키는 사람이 일부라는 사실 또한 기막힌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참 슬프네요.
1967년 시인 김수영은 “나는 아무것도 안 속였는데 모든 것을 속였다/이 죄에는 사과의 길이 없다(「거짓말의 여운 속에서」)”라고 썼지요. 4.19의 실패 후 바쁘게 침몰하는 혁명에 대한 비토와 죄의식이었겠지요. 시인은 아팠고, 아픔은 진실했답니다. 진짜 무서운 죄는 명확한 형벌이 아니라 나설 때를 놓친 게으른 실천력이며, 그것에 대해 감각하지 못하는 무딘 감수성이라는 의미로 저는 읽었네요. 그는 탁월하게 울었지요. 그리고 그 울음은 이 시대에도 유용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살려 내야 할 귀한 아픔이라고 믿어요.
관망은 속이지 않아도 속이는 죄이며, 사과의 길조차 어둡고 무서운 죄이기도 하고, 다음 세대까지 점염되는 질병이기에, 반드시 수정해야 할 우리들의 숙제랍니다. 두 번째 말씀도 허를 찌르네요.
 
“위대한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린 위대한 꿈을 포기하고 삽니다. 두렵고 무섭지요. 위대함이란 거대서사가 시나브로 사냥당하고 있네요. 작은 이야기(미시서사)에 적응된 우리는, 큰 이야기에 떨고 있습니다. 위대함을 실천하는 거대서사가 소박함을 표현하는 미시서사에 감금되고 있는 것이지요. 걸기나 의분(義憤)은 나쁜 말이 되어 가고, 공감과 치유만이 대안이라 믿어지지요. 위대함을 위한 찬사도 기력을 방출하고 있네요. 심지어 열정보다 기술이고, 기술보다 효율이기에 염결한 돈키호테는 엉터리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또 다른 찬사가 반대편을 점거하고, 농성 중인 사람들이 아직 다 죽지않은 것은, 그나마 우리의 삶이 포기되지 않은 증거이기에 참 다행이네요.
기실 이 시대, 위대해지려는 열정은 버거운 단어가 되고 있지요. 성공을 위해 열정을 추동하는 선전이 있고, 열정적 영웅을 복원하자는 광고가 있습니다. 둘 모두 ‘열정의 쓰임’에만 몰두된 보수적 관점임은 물론이거니와, 열정을 쓸모 이상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비겁한 개념들이랍니다. 열정이 개인적 삶의 징후 정도로 추락한 것이지요. 열정이 성공을 위한 기초공사 정도로 애용되고 있지요. 때문에 위대한 꿈을 꾸는 것은 불온하기까지 하고, 위대함은 포기되거나 유보되기 쉬워지지요. 잠잠하고 소박한 꿈을 누리는 데 여지없이 삶의 방향이 고착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우리에게 열정은 성공을 위해 존재를 투척하거나, 자기를 위해 시간을 쪼개고 응축하는, 독아론적인 마물들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험을 투옥시켰고, 열정을 감금했네요. 창조적 열정이 빠르게 추락하고 있답니다. 교황의 말씀이 무섭도록 아픈 이유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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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에게도 열정은 은밀하고, 집단적인 강요랍니다. 젊은 교사들의 열정이 삭았다는 지적도 익숙한 잔소리가 됐네요. 교실 붕괴의 원인을 교사의 열정 쇠퇴와 연결 짓는 무리한 시도도 아직 단단하지요. 열정의 본질을 사유하거나 집착하기보다 나태하게 버려둡니다. 열정에 대한 개념을 단순화시키기도 하고, 성실과 열정을 혼동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네요. 열정적 교사는 복무에 치열한 존재라는 언표가, 언론에 의해 침투되고 있는 것 또한 엄밀한 현실이지요. 이것은 미래에 대한 비극입니다. 교육만이 백년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상식이 무너지기에 그렇고, 열정을 현실 적응의 수단으로 유포하기에 더욱 그러하지요.
며칠 전 제가 다니는 학교에 외국인 선생님이 왔답니다. ‘TaLK(Teach and Learn in Korea) 장학생’이란 제도에 의해 불려 온 그는 우리말이 서툴렀지요. 도움이 필요한 그에게 몇몇 선생님들이 다가갔답니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소담한 대화가 오갔고, 코가 큰 선생님은 가끔 웃었지요. 영어에 능숙치 못한 다수의 선생님들은 코 큰 분 앞에서 작아졌고, 저 또한 꼬마가 된 것이 사실이랍니다. 중학교부터 알파벳을 배운 교육 제도 탓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만, 그보다 제게 영어는 매력적인 공부의 소재가 되지 못했다는 게 맞는 판단이라 애써 믿어 보았지요. 간혹 영어 원서를 해석하는 데 재미를 맛보긴 합니다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제 체질과 비위에 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별로 힘쓰고픈 공부가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지요. 문제는 저처럼 영어에 관심 없는 선생님들을 바라보는 다른 분들의 시각입니다. 영어 능통이 열정적 교사로 표상되고, 영어를 얻기 위해 새벽을 갈랐다는 열정적 고백들은, 영어 선생님과의 대화 미숙으로 작아진 다른 선생님들의 작은 키마저 잘라 냈지요. 영어가 교사 자질의 근간으로 쓰이고, 영어 정복이 열정적 삶의 표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들이 바라보는 열정의 참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네요.
학교에서도 열정이 작은 것들에 의해 속박당하고 있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대로 효율을 높일 수있는 기술이, 열정이라 말해지고 있지요. 미래의 꿈을 모색하고 창조적 인간을 육성하려는 본디 열정의 개념이 갉아먹히고 있는 것입니다. 타자를 위한 열정이 사라지고 자기 계발의 전투적 논리가 교육무대까지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반복컨대 자기를 위한 열정은, 열정이 아니랍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의 말씀대로, 진짜 열정이란 위대함 곁에 붙어 있어야만 하지요. 열정적인 교사가 모두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물론 국제적 언어를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비방하진 않네요. 단, 교육에 있어 영어보다 쏟아야 할 열정이 무수히 많다는 진단은 반드시 옳습니다. 교육은 시대가 세속적으로 추락하고 더러워진다고 해도, 애써 위대함을 가르치는 행위이며,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려는 감수성이기에, 열정이어야만 하지요. 위대함에 대한 열정이 교육 안에 축제처럼 피어나야 하겠지요. 때문에 열정이라는 그 낱말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유의 힘으로부터, 교육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쉽지가 않네요. 열정은 자명하고 명증한 개념이 아니기에 그렇지요. 열정은 수수께끼 같고, 미궁 같이 복잡합니다. 그리하기에 열정은 열정적으로 사유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독재 시대의 열정’이나 ‘자본 독재 시대의 열정’처럼 우리를 파멸시키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으니까요. 미래를 향한 교육에 있어 열정은 반드시 정확하게 읽어 내야 할 어떤 임무이며, ‘사랑의 열정’이어야만 한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특히 교육은 우리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기에 시작과 끝이 모두 절실한 사랑이어야 하겠지요. 아이들은 우리들의 꿈이고, 그네들이 살 세상은 지금보다 좋은 세상이어야 하기에 꼭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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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이전부터 우리에겐 깊은 참극이 참 많았네요. 용산 참사, 제주 강정마을, 쌍용자동차, 밀양 사태가 대표적이지요. 자본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합법이란 판결을 겪었고, 지는 싸움에 생명을 던지는 그들을 울게 해야 했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를 철 지난 유령처럼 기억 박물관에 박제시키려는 사람들 또한 우리였지요. 우린 자주비겁했네요. 나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외면해야 했습니다. 정치가들에게 모두의 책임을 손쉽게 넘겨버리기도 했답니다. 바른 해결보다 이른 척결을 바랐지요. 우린 관망했고, 체념했습니다.
패배주의는 ‘사랑의 열정’에 가장 큰 적이랍니다. 프랑스의 세계적 석학 알랭 바디우는 밀려온 패배에 대해 감히 회초리를 들라 했답니다. 세계적 철학자인 그는 2013년에 한국의 투쟁 현장을 찾았고, 그들의 편에 섰지요. 쌍용, 용산, 제주, 밀양을 응원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에 정당성을 불어넣었지요. 투쟁하는 자들은 이기주의가 아니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복직과 위로금을 넘어 이 시대를 새로 쓰는 지독한 사유라고 말했답니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적 반항’을 실험하라 했고, 사유의 폭발력을 지켜내라 했네요. “모든 복고(습관적 보수)는 사유를 두려워한답니다.◆1”
복고는 견해를 추종하지요. 상대주의가 절대적 힘으로 반복되는 이유는, 사유가 가진 그 막강한 힘을 복고가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사유는 진실에 근접할 수 있게 하는 단단함이고, 진짜와 가짜를 가르게 하는 날카로움이며, 반항을 사회적 변화로 승화하는 슈퍼 파워이기에 그렇지요. 그래서 사유는 열정입니다. 이 열정은 새로움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지요. 지금 이 순간과 단절하는 창조력이기도 하고요.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절망을 포기하지요.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사랑이랍니다.
“사랑은 신체와 정신의 이원적인 모험이요, 둘인 것에 대한 경험과 사유이자, 대조 속에서 굴절되고 변화된 세계입니다◆2”
체념을 극복하는 힘이고, 삶을 새로움의 곁으로 밀어붙이는 힘이지요. 사랑은 자기도취의 위험을 알린답니다. 시련을 이겨 내고 존재를 충전시키지요. 사랑은 열정입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고통을 극복하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열정적 사랑은 새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때문에 사랑은 위험하기도 하지요. 사랑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기에 폭발적입니다. 사랑은 삶과 세계를 전복하기도 합니다. 사랑 예찬은 ‘사랑의 열정’으로 ‘새로운 세상’, ‘창조적 인간’을 구축하고자 하는 윤리이자, 사명이고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진짜 열정인 것이지요.
사랑은 실재(진짜)의 새로움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새롭게 출몰하고자 합니다. 바디우는 이것을 ‘실재(實在)에 대한 열정’이라고 했고, 그것이 이루어진 무대가 지난 20세기 초반이라고 주장하지요. 조금 길지만 그의 말을 달아봅니다.
1890년에서 1914년에 이르는 위대한 두 10년을 20세기의 서막으로 고려해 봅시다. 사유의 모든 질서를 놓고볼 때, 이 두 10년은 오로지 피렌체의 르네상스만이, 또는 페리클레스의 세기만이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만개한 창조의 시기, 이례적인 발명의 시기를 대표합니다. 이 시기는 촉발과 단절의 경이로운 시대였던 것입니다. 몇몇 지표만을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1898년 현대적 글쓰기를 표명한 『주사위 던지기』를 출판한 직후 말라르메가 죽었습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제한된 상대성을 창안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푸앵카레가 아인슈타인보다 앞서지 않았다는 가정 아래서입니다. 또한 같은 해에 아인슈타인은 빛의 양자 이론을 창안합니다. 1900년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출판함으로써 정신분석학적 혁명에 자신의 최초의 체계적 대작을 선사합니다. (중략) 특히 쇤베르크는 비음계 음악의 가능성을 세웠습니다. 1902년 레닌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증언된 창조물인 근대적 정치를 창조했습니다. 제임스와 콘래드의 수많은 소설이 출판된 것,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적 부분이 쓰인 것, 조이스의『율리시스』가 무르익은 것 또한 세기의 초반부였습니다.
프레게로부터 시작된 수학화된 논리학과 그것에 부수된 것들 그리고 언어철학이 러셀, 힐베르트, 젊은 비트겐슈타인, 그 밖의 다른 몇몇 사람과 더불어 영국과 대륙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가 회화의 논리를 뒤흔들었습니다. 후설은 고독 속에서 집요하게 현상학적 기술을 펼쳤습니다. 또 이 모든 것과 병행해서 푸앵카레 또는 힐베르트 같은 뛰어난 천재들이 리만, 데데킨드, 칸토어의 계보를 이어가면서 수학의 스타일 전체를 다시 세웠습니다. 1914년 전쟁 바로 직전에 작은 나라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시에 아주 곤란한 과업을 확정하였습니다. 영화는 발명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멜리에스, 그리피스, 채플린 같은 최초의 천재들을 발견합니다. 이 짧은 시기에 일어난 경이로운 일들을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철학, 과학, 수학, 문학, 영화,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현대 인문학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20세기 초반에 창조되었네요. 이 의지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고자 한 열정이라고 바디우는 말합니다. 새로움은 전통과 단절하지요. 전통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심지어는 반항합니다.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네요.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릴 수 있고, 사랑하기에 자기보다 큰 세상을 위해 희생할 수 있으며, 부조리와 부패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답니다.
‘사랑의 열정’만이 진짜 열정이지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내가 남이 됩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랑인 것이지요. 진짜 열정은 ‘사랑의 열정’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사랑」에서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라고 말한 이유도 같았답니다. 사랑은 칠흑 같은 어둠과 찬란한 불빛에도 날카롭게 너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이지요. 우리의 열정이 사랑을 향해 다듬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답니다. 그것은 악무한처럼 뻔뻔하고,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기득권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기에 민주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열정은 서로를 감동시키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나쁜 사람들과 맞서게 하지요.
작은 이야기들에 침몰되고, 자기 계발로 오염된 진짜 열정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짜 열정을 실천하는 곳으로 다가가야겠지요. 사랑하려면 우선 매력적인 사람들과 만나야 하니 말입니다. 그 만남은 현장 속에 있답니다. 세월호, 쌍용, 밀양, 제주 그리고 우리들의 열정적 사랑을 절실히 원하는 아이들 곁으로 뚜벅뚜벅 사랑하러 가야겠네요. 많이 위험하고 떨리는 사랑이 될지도 모르겠지요. 실패하면 상처가 깊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진짜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답니다. 아니 그런 사랑만이 열정이란 수사를 허가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세기』에 박힌 페소아의 시를 붙입니다. 진짜 사랑을 위해! 사랑의 열정을 위해! 우리가 조금 더 모험해야 하는 까닭을 소리치는 목소리로 이해해 주시길.
 
아! 해적이여, 해적이여!
맹렬함으로 하나가 된 불법에 대한 열정이여!
절대적으로 잔인하고 가증스러운 것에 대한 열정,
허약한 우리 신체와 여성적이고 섬세한 우리 신경을
마치 추상적인 발정마냥 물어뜯는 열정,
미쳐버린 엄청난 열기를 우리의 공허한 시선 속에 풀어놓는 열정이여!◆3
 
◆1 알랭 바디우. 박정태 역. 『세기』. 57쪽.
◆2 같은 책. 257쪽
◆3 같은 책 211쪽. 페소아의 「해상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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