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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그래도,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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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11-06 22:33 조회 6,90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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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산 홍천 매산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인디고 연구소 기획|궁리|2014.06.23
 
1_
가난이라는 그 비굴함을 잊기 위해 인간은 가끔 성실해지기도 합니다. 제 대학 생활이 꼭 그랬습니다. ‘등교는 가장 빨리, 하교는 가장 늦게’라는 자폐적 규칙을 헌법처럼 모시고, 시간을 낱낱이 재어가며 시계처럼 찰칵찰칵 살았습니다. 노동 없이 공부를 버틸 수 없던 처지까지 갔을 땐, 몸은 자주 삐걱댔고 정신은 곧잘 울었습니다. 벗을 둘 여유라는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이 지긋지긋한 궁핍을 탈옥하겠다는 걸기뿐, 나머지 욕망은 모조리 삭제하는 것이 응당 도리인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감정과 감각을 몰아내고 오직 이성과 의지로 삶을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가난이 공포처럼 강화되는 요즘, 학생들이 스펙을 목숨으로 삼고 그렇게 젊음을 파괴하는 모습은 과거 제 모습과 같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부덕함이 아니라 불안정한 미래가 인간을 절망으로 밀어 넣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답안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그리 믿습니다.
일과 공부라는 영어(囹圄)에 갇혀 가난을 은폐하며 보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학교에 대규모 데모가 터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교육 시장화 반대’와 ‘교사의 정치적 자유 보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바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제게, 투쟁은 낯설고 응시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요. 좌파 빨갱이들의 난동이라고 그들을 폄하하는 빈약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대학생이 국가를 거역할 수 있다는 학우들의 치기가 어리석어 보였던 것은 맞습니다. 불가능한 싸움에 맹랑하게 덤비는 불나방들에게 다가올 불행을 훈계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게 투쟁은 나쁜 싸움이었으며, 젊음의 패기를 오용하는 찌꺼기로 보였습니다. 오직 그녀의 처절한 눈물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투쟁이 달포를 넘어갈 때 학우들은 다소 지쳤고, 내부 분쟁은 짙어졌습니다. 모든 투쟁이 그렇듯 수정주의자들이 출몰했습니다. 트로츠키의 ‘영구투쟁론’도 나왔습니다. 투쟁 폐기 근거가 단단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초심은 해지고 불나방의 최후를 몇몇 학우들이 공감 중인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현실적 지옥이 희망을 향한 연대를 갉아 먹고 있었던 어느 날입니다. 정확하게는 쾌청한 하늘에 취해 삭아가는 투쟁을 관조하기 좋았던 시월의 가을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꺼이꺼이 숨 막히는 울음이 울렸습니다. 잔뜩 울어봤던 제 몸은, 그 울음의 뿌리를 탐지하고 멋대로 걸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은 비애를 채색했지요. 창백한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울음은 자기 세포를 모두 태워 승리의 땔감으로 날려버리려는 각오처럼 날카로웠습니다. 주변 학우들까지 통곡을 연대하고 있었던 이유였겠지요. 그녀는 학과를 이끌던 학회장 후배였고, 가끔 제가 불쌍하다며 밥을 같이 먹어 주는 착한 친구였습니다. 투쟁 패배가 현실화되는 끔찍한 지경을 눈물로 씻고자 했던 울음이라 어림했습니다.
그녀의 처참한 절규는 수정주의를 단방에 침몰시켰습니다. 저 또한 기계적 삶을 접고 투쟁에 나서게 되었지요.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었고, 그녀의 눈물은 고통에 패배해 흘린 싸구려가 아니었으며, 오직 절망의 순간에 자기를 극기하려는 눈물이었고, 타인을 위해 마지막 생기를 쏟고자 하는 결의였습니다. 투쟁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녀를 통해 연대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 종류의 울음을 터트릴 만한 그 무엇이 투쟁이라면, 아마도 삶의 일정 부분을 걸어도 될 만한 가치가 단단하리라 짐작해 보았지요. 지금도 내내 당시 성찰은 유효합니다.
그날 이후 저는 ‘내 가난의 저주’를 풀기보다 ‘가난의 원인을 추적’하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녀처럼 울 수밖에 없는 세상을 아프게 알고 싶었던 게지요. 제 것보다 거센 남의 고통이 세상에 널브러져 있다는 진실을 통감했습니다. 그녀가 인간이란 개념을 가르쳐 주었던 게지요. 감정과 감각은 이성과 의지에 선행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향해 매진해야 하는지, 절망 속에서도 흠뻑 같이 울어 줄 심장이 무언인지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굴하는 비참하도록 근사한 울음은, 망각을 절념(絶念)한 ‘순간의 꽃1’이었습니다.
 
◆1 2001년 발표된 고은 시인의 시집명. 이 시집은 순간이 무긍이라 설득한다. 출몰하는 순간을 놓치고 저 먼 곳을 향한 모든 존재는 그곳에 당도하지 못할 뿐더러, 그 먼 곳의 의미조차 파악할 수 없다. ‘순간의 꽃’은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게다.
 
2
침몰하는 대한민국, 절망은 체념되고 아우성은 좌절한 듯합니다. 다소 나아지기보다 나빠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조차 바삐 가라앉고 있습니다. 아프고 처절합니다. 그러나 고초(苦楚)를 통감하고 변화를 행동하기보다, 통증을 마취하고 고통을 연기하려는 부류가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선을 선전합니다. 이미 비통한 원한들이 귀천을 떠도는 순간에도 그들은 수정을 약속하고, 있었던 어제를 없었던 과거로 꾸역꾸역 묻어버리고 있습니다. 이 강토가 늪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단어가 지워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태 이후, 지금까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웠는지 잊고 지냈습니다. 한참을 표류하며 내내 비관했습니다. 역사의 진위를 묻는 아이들에게 승리자가 쓰는 것이라는 대답까지 나왔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당한 꿈이라고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마침내 보궐선거까지 세월호를 침몰시킨 그 세력이 이겨버렸습니다. 우주를 설명할 수 없어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발견했다는 과학자들의 기사를 읽으며,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없어 어두워지는 그 무엇인가를 발명하는 것이 응당한 이치라는 착각까지 출몰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인 교사가 그 질문의 의미를 잃어버린 난국입니다.
자포의 깃발이 들려지는 순간, 잃어버렸던 그녀의 울음이 떠올랐습니다. 절망을 절망이라 말하지 않으려는 눈물. 포기를 파괴하려는 투명한 진실에서 흘렀던 그 눈물. 그 눈물에 대한 회상이 희망이 되는 지점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끝까지 싸워보지 않는 전사만이 패잔병이며, 다 해보지 못한 포기는 무용함이라는 진실을 말이지요.
듬뿍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빨려가는 늪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합니다. 전쟁을 끝내고 좀비처럼 살라는 사이렌 소리가 매혹적입니다. 제 몸을 포박하고 유혹을 지켜냈던 오르페우스를 받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길”◆2이란 믿음을 숭배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처참한 상황에도 희망은 항복할 수 없습니다.
희망 사전 제작을 욕구했던 적이 있습니다.◆3 절망이 도전할 때 응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희망밖에 없다는 뜻이거니와, 고통의 심연만이 희망의 퇴비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질박한 현실에서 ‘희망은 살아 있는자의 의무’라고 썼습니다. 철학자 박이문은 구원을 회의하되 천진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게 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당부합니다. 유래 없는 ‘주체의 위기’ 속에서 ‘책임은 표류’하고 있지만◆4, 현실을 개혁하려는 정치를 죽어가고, 누군가를 다스리는 권력만이 도드라집니다. 권력과 정치의 분리는 정치를 공동선을 위한 장치에서 치안 유지를 위한 검열 수단으로 추락했습니다. 설득하고 용서하기보다 겁박하고 가두는 권력입니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랑시에르)입니다. 치안이 정치가 된 사회에서 신뢰는 힘을 잃습니다. “무지와 무기력과 모욕이 뒤범벅되어 있는 것”◆5이지요.
이런 사회는 서로가 필요에 의해 묶일 수밖에 없는 사태에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회에서 어떤 교육이 가능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명증하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진실로, 교육 불가능한 시대에 생존하는 것이 공통 의무입니다. 비인간성이 영리함이라 봉양(奉養) 받는 시대에 교육이 당위를찾을 수 있으려면, 그것은 어떻게 설계돼야 하는지 궁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희망만이 설계도라고 당돌하게 말하려 하지만, 그 추상을 예리하게 구체화시킬 수 있을지는 고민입니다. 고령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경청해 봅니다.

저에게는 아주 오랜 신념이 있습니다. 저는 체제나 이념이 극명하게 다른 나라들에서 살았었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다양한 인간의 삶을 배우고 탐구했습니다. (중략)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르고, 동서남북 사방 천지를 돌아보아도 인류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의 어려움이라는 겁니다.◆6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어려운 삶의 순간마다 그저 분하게만 여긴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복도 함께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죠
.◆7
 
행복이란 단어를 희망이라 고쳐보겠습니다.
 
‘희망을 품으며 사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희망에 도달하는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교육기관으로서, 시민들이 끊임없이 자기 학습을 하는 곳” ◆8입니다.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노정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삶을 향해 가는 과정 그 자체지요. 완성될 수 없기에 안주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제가 욕구한 희망사전에 딱 이 말은 들여놓고 싶어집니다. ‘희망은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만이 희망이다’라는 순환만으론 다 해결할 수 없어 보입니다. 다시 바우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문제는 지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 만족할 만한 현실 세계의 변화까지도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로 좁혀집니다. 간단히 말해 지각 변화를 통한 현실 변화의 가능성의 문제인 것이죠. (중략)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아는 것이라곤 이것이 성공하리라는 확신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 없이는 행동의 가능성조차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기존의 습관적 굴레를 벗어나서 목적이 분명한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행동의 목적을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가시적이고 지각 가능한 영역으로 이끌어올 때에 비로소 가능해집니다.(중략) 즉, 현실의 파편들을 재구성하여 행위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으려면, 그 현실의 파편들이 ‘손 안의’ 상태로부터 ‘손 앞의’ 상태로 변모해야 합니다.◆9

지각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에서 다소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지각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는 사회에서 감각되는 형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같은 사태와 사물이라도 지각의 형식이 바뀌면 다른 세계가 됩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세계-내-존재’라고 썼습니다. 나를 관통한 세계만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라는 객관적 실체가 나(주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각 형식이 세계를 존재의 층위로 구성한다는 뜻이겠습니다. 바우만 할아버지는 그것은 ‘손 앞에 현실을 두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손 앞’이란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진보라고 말한 의미와 닮았습니다. 벤야민은 진보(혹은 희망)를 ‘딱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머나먼 희망의 숲을 향해 현실을 버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묘하고 미세한 현실을 딱 한 걸음만큼 바꾸는 것이 진보고, 그것들의 응축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익숙한 것을 낯선 눈으로 보게 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시함으로써, 인간 세계를 통념이나 억견의 비가시성으로부터 구출하여, 사유의 몰입, 각성의 영역, 결단력 있는 행동의 대지로 이끌어 가는 것”◆10이지요. 요컨대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무기력이며 회피며 비겁함입니다. 다소 구체화되는 듯 보입니다만, 아직 희망이 절망의 사회에 유일한 대안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부족합니다.
 
◆2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103쪽.
◆3 김준산,『교사, 가르고 치다』, 219쪽.
◆4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33쪽.
◆5 같은 책. 83쪽.
◆6 같은 책 98쪽.
◆7 같은 책 103쪽.
◆8 같은 책 22쪽.
◆9 같은 책 155쪽~156쪽.
◆10 같은 책 157쪽.
 
3_
희망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각 형식을 바꿔야 하며, 희망을 지키기 위해 끈덕지게 그를 물고 늘어져야함을 물론, 반드시 절망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절망에 대한 기억력은 희망에 대한 추진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절망에 삿대질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나쁜 놈들의 역사가 지독하게 반복되더라도 우린 그 반복을 감히 잊지 않고, 버거운 싸움을 버텨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다는 아닌 듯합니다. 절망이 가깝지 않아도 간혹 인간은 자기 안에 냉소를 붙여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과장하고, 손쉬운 선택을 옳은 선택이라 믿고 싶은 나약함에서 오는 질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냉소를 금기하는 단호함이 희망을 낡게 하지 않는 출발임은 자명합니다.
절규가 절망이 되어갈 때, 포기는 당위가 되고 작은 변화를 무심하게 버려두게 됩니다. 제아무리 절망의 반복이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린 어제보다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칼의 승부가 아니기에 무디더라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무딘 칼날이 절망을 완강(頑剛)하게 도전했던 사실을 읽어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위해 사랑을 모셔 와야 하고 이를 가르쳐야합니다. “오직 윤리적 주체로 설 때에만 인간성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인간의 고유성과 인류의 공동체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11 루카치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네요.
 
나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을 향한 헌신은 고독을 종식시킨다. 아마도 윤리가 인간 삶에서 갖는 최고의 가치는 인간 사이에 그러한 교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근원적 홀로 있음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윤리는 모든 인간에게 공동체의 감각을 배양시킨다. ◆12
 
그러나 이 윤리는 희생만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고유한 주체는 헌신을 희생이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윤리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문제에 가깝습니다. 나를 찾지 못한 주체가 남을 향해 살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붙어 있습니다. 나로부터의 혁명은 남에게도 진실한 감각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의 숙명 또한 여기에서 발족하기를 소원합니다. 교사 스스로 고유한 주체성을 찾아, 그 지점을 공부하고 흡수하는 것이 가르침의 윤리이며, 교육이라 부르는 행위의 근간일 수 있습니다. 고유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유일하게 존중할 수 있는 법이지요. 절망에 패배한 냉소는 특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슬프기에 더더욱 웃으며 싸워야 하며, 이것이 온당한 윤리이기에 ‘공동체의 감각’이 아낌없이 배양해 내야 합니다.
괴테는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행복하기만 한 나날을 보낸 적은 단 한 주도 없었다.” ◆13 라고 고백합니다.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 행복할 삶을 보증하지도 않거니와, 진짜 교육은 없는 이상을 있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지만 있는 현실을 동전(銅錢)하려는 용기니까요.
그녀의 눈물을 기억하며 글을 닫고자 합니다. 지금은 어떤 삶을 꾸리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연이 매섭다면 언젠가 그 눈물의 강력함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많겠지요. 하지만 그녀와 만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절망하는 아이들과 좌절하는 후배들에게, 아우성쳐야 할 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막기 위해, 부속품처럼 소모되는 아이들의 미래에 저항하기 위해, 오늘의 이 굴욕을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더라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희망을 떠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녀의 울음은 이 질박한 현실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라는 명령처럼 지금도 가깝습니다.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라고 쓴 임길택 선생님의 담소를 회상하며, 진짜 우는 법을 배우기로 다짐해 봅니다. 그녀를 닮을 울음을 다시 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 아이들이 그녀처럼 울게 하지 않기위해서, 울어야 할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은 꺼이꺼이 펑펑 울고 싶습니다. 희망,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를 위하여!
 
◆11 같은 책 97쪽.
◆12 같은 책 198쪽 재인용.
◆13 같은 책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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