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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새책 [청소년 예술 깊게 읽기]기억 속의 가난과 기억 밖의 어둠을 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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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2-10 21:43 조회 7,68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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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네 소사 1~3』
정용연 지음|휴머니스트|237쪽 내외|2012.07.23
15,000원|고등학생|한국|만화

유년 시절에 친지들이 손 내밀어 쥐어주던 세뱃돈이나 먹거리는 크든 작든 나를 오랫동안 행복하게 해주었다. 흐뭇한 기억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긴 시간 살아남아, 그 시절 나만한 어린아이에게 용돈을 쥐어 줄 나이가 된 지금도 흐뭇한 체온을 떠올리게 한다. 병으로 아들을 잃고 작은 만홧가게를 꾸려가던 아주머니의 공짜만화나 남편 잃고 악착같이 돈을 벌던 생긋 장수 아줌마가 품삯으로 건네던 생선처럼 기억 속의 가난과 기억 밖의 어둠을 둥글게 만드는 때 묻은 기억의 주인공들을 우리는 평생 간직한다.

1968년생 만화가 정용연 씨가 그려낸 『정가네 소사(鄭家네 小史)』는 부모님의 기억을 빌려 재구성한 정씨 집안의 작은 일상사다. 작은 역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만화는 만화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서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님과 부모님을 태어나게 한 부모님의 이야기까지 외연을 넓혀간다. 칠 년 동안 스물네 가지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이야기들이 세 권의 단행본으로 묶였는데, 두서없이 토해지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친가와 외가, 아버지와 어머니, 친지와 자식들의 이야기를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모님의 만남과 결혼, 가족의 탄생을 사진하는 약혼사진의 모습이나 찾아갈 때마다 공짜 이발을 시켜주던 순호 당숙의 이발소 풍경은 이 책의 이야기들이 한 가족의 개인적인 일상사이면서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을 그려낸 풍속화임을 암시해준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물오른 아이들은 어른들의 연애장면이나 의학서적에 그려진 인체도를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청량리 뒷골목에 늘어선 요염한 여자들을 보며 묘한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성냥공장에 다녀야했던 누이 또래들의 아픔을 담아낸 에피소드 등은 성장담으로 나타난다. 다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추억담보다는 어렵게 꺼내졌다가 도로 입이 다물어지는 고통의 기억이 더 짙은 법이다.

책을 펼치면 나타나는 가계도로 인해 증조할아버지부터 현재의 ‘나’까지 사대에 걸친 친가와 외가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기실 분량면에서도 괴로움의 주인공으로 중심을 잡고 있는 이는 친가의 아버지 정동호와 외가의 외할아버지 김병옥이다. 의무병 복무시절로 인해 마을의사 노릇을 하며 존경을 받았지만, 가방끈 짧은 학력으로 인해 아부이(무면허 의사)로 고발 당한 아버지나 부농의 자식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금전판에 뛰어들었다가 술, 여자, 도박으로 인생을 탕진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연민도 아까운 실패담일지도 모른다.

무능한 남편으로서, 무력한 아버지로서 이들이 보여준 실패는 계속 이어진다. 그림을 가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서로 다른 위치에 얹은 붓글씨체 제목처럼 나란히 서 있는 삼대, 세 여자의 모습이 담긴 셋째 권은 이들 길 잃은 남편을 대신해 삶을 꾸려갔던 억척스런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닮은 듯 서로 다르게 그려진 오연하, 김정숙, 정미경. 각기 성이 다른 세 여자들은 실타래처럼 이어져 남편들이 소홀했던 자식들을 돌보고 정가네를 지켜낸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아무런 생각 없이 둥구(풍뎅이)의 목숨을 빼앗았던 아이들의 위험한 장난이 담긴 「곤충기」다. 격동의 역사는 눈먼 죽음의 칼을 휘두르며 수많은 이 땅의 아버지들을 쓰러뜨린 아이들의 악의를 닮아있다. 이장에게 매력적인 조건의 정부수매사업으로 권유받았던 양잠 사업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의 변화로 대출금도 갚지 못하는 망한 사업이 되어 버렸다. 메우지 못한 금점판 자리에 생긴 금방죽은 죄 없는 아이들과 외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근동에 똘똘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금호 당숙은 전쟁 때 빨갱이 대장이 되었다가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야 했으며, 사관학교에 들어가려 했던 형 경연의 꿈은 만나보지도 못한 당숙의 존재로 인해 연좌제에 걸려 좌절된다.

비슷한 선으로 그려진 인물들의 엉성한 외모는 이야기 속에 뚜렷이 드러나는 각자의 개성에 의해 구분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하나의 가족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감정의 울렁임을 불러오기 힘든 밋밋한 서사나 ‘산탄’편처럼 엉뚱하게 외국인 근로자들이 다치는 유형을 정리하는 에피소드는 ‘청량리’나 ‘성냥공장 소녀’ 같은 섬세한 감정선이 돋보이는 이야기들마저 맥빠지게 한다.

모든 에피소드를 읽고, 책을 덮은 지금 『정가네 소사』의 주인공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고통의 기억 속에 각자의 인생을 이끌어가며 시대를 짊어졌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지난날의 기억이 공유될 때 우리는 가족이라는 내면의 지문指紋을 확인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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